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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ATA[Gelassenheit]]> http://blog.knsu.ac.kr/balinais nblog balinais <![CDATA[카프비평을 다시 읽는다(역락, 2024)]]> external_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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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knsu.ac.kr/balinais/3282 2024-09-13 13:30:37.0
balinais <![CDATA[헤겔 엔찌클로페티(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강요)_국역본 초판(을유문화사, 1983, 서동익 역) 표지]]> external_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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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knsu.ac.kr/balinais/3203 2023-07-21 09:44:27.0
balinais <![CDATA['Affect'의 번역어 문제]]> <‘Affect’의 번역어 문제>


* <이는 스피노자로부터 비롯한 개념이지만, 현행 용법은 들뢰즈의 창조적 변용으로 간주하는 것이 맞다.>


- 정서(情緖, emotion): 개인적이며 정태적인 뉘앙스 때문에 부적절


- 감정(感情, sentiment): 흥분 상태의 부정적 정념과도 혼동될 수 있어 부적절


- 감응(感應, resonance or correspondence): 축자적으로는 부합하지만 동양적 신비의 연상작용 때문에 다소 부적절.(무엇보다 스피노자의 원 개념이 갖는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들을 생략하고 단일화의 위험이 따른다.[이에 대해서는 보충설명])


- 정동(情動, affect): 원래의 단어(affect)가 지닌 역동적 측면을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으며, 그것이 내포한 다양한 층위들을 두루 포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적절


** 감응(또는 감통[感通])은 <<주역>>을 위시한 명백히 동양적 사유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의미상 소통에 기반한 ‘공명’(resonance)에 보다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것은 인간과 인간(자연)만이 아닌 자연 간의 교감까지를 포함한, 즉 인간주의를 넘어선 것이다.


*** 용어의 개념적 정확성·엄밀성과 함께 그 의미의 개방적 포용성, 경험적 현실에 대한 설명능력의 실효성 및 확장 가능성, 번역어를 둘러싼 그간의 진행과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현재 지속가능한 유력한 용어는 ‘감응’과 ‘정동’ 두 가지로 압축됐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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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knsu.ac.kr/balinais/3202 2023-07-21 09:05:43.0
balinais <![CDATA[맑스_일반지성(General Intellect)_그룬트리세_MECW, VOL 28, p. 92.]]> external_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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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knsu.ac.kr/balinais/3201 2023-07-21 08:54:02.0
balinais <![CDATA[레비나스의 주체 개념]]> 레비나스의 주체 개념에 대한 가장 흔한 오독의 하나는, 그가 주체의 자리에 타자를 대신놓음으로서(써)[이는 또하나의 주체에 불과한], 상투적인 '나'와 '너'의 상호주관성 비슷한 것을 꿈꾼다는 견해입니다(대표적으로 마르틴 부버의 논의와 같이).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왜곡되거나 피상적으로 이해된 것입니다. 오히려 레비나스는, 강한 의미에서, 주체의 이론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했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무한한 계기로서 타자를 깊숙이 수용함으로써 주체의 무한한 확장과 초월 가능성을 타진한: 다소 부정확한 용어선택입니다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주체가 존재자가 아닌, 존재의 한 양식이며, 하여 상상의 산물인 '자아'가 지닌 허상을 무너뜨린다는 점에 레비나스 사유의 독창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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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knsu.ac.kr/balinais/3199 2023-07-21 07:34:29.0
balinais <![CDATA[자유에 이르는 길]]> 인간이 자유에 이르는 길은 이성의 능력으로 정서의 힘을 제어함으로써가 아니라 슬픔의 정서를 기쁨의 정서로 바꾸는 능동적 자기행위에 의해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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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knsu.ac.kr/balinais/3198 2023-07-21 07:27:53.0
balinais <![CDATA[에고리스와 코나투스]]> <에고리스와 코나투스: 주체가 자아를 초월하여 무한한 타자에게로 향하게 될 때, 자아의 문턱과 경계가 허물어진 채 주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주체의 자리가 더이상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우려에 대해>


이는 현존재로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주체가 초월의 형이상학적 욕망에 의해 인도될지라도, 인간은 존재를 지속하고 자기를 보존하려는 욕망, 코나투스(conatus)의 강력한 힘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고리스(egoless)'는 하나의 지향성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일뿐, 실제로 주체의 흔적이 남지 않는 순수한 에고리스라는 사태는 어떤 순간에서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는 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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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knsu.ac.kr/balinais/3197 2023-07-21 07:24: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