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의 방법
많은 책을 읽어 글자로 진리를 밝히려는 사람은 그 책들의 무게에 짓눌려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글자를 멀리하는 사람의 위험은 신비에 맛을 들이는 것이다. 신비의 유혹에 굴복하여 기쁘고 즐겁고 재미있는 일만 따라가다 보면 감성과 추리와 상상만으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 재미에 기인하는 열심은 하느님께 대한 요구를 필요 이상으로 대담하게 만들고 버릇없고 볼썽사납게 만든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메마름을 견뎌내는 일이다. 재미있고 편안할 때가 아니라 메마름을 견딜 때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과의 사귐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게 된다. 메마름 속에서 어둡고 은밀한 직관이 겸손과 사랑을 기른다.
-김인환, 「대승기신론초」 중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뒤로 하고 곧 긴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대개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는 하나, 실제 사람들이 책을 더 많이 읽는 기간은 여름과 겨울 동안이다. 특히 대학생들의 독서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방학 기간 중에 집중되어 있는 편이 사실이다. 대학시절 독서의 성패는 실로 방학을 통한 열정적인 책 읽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다양한 사회적 책무와 함께 생활인으로서 나날의 삶을 꾸려나가는 데 많은 힘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독서의 시간을 따로 마련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 시절 독서, 특히 고전 읽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평생 고전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학생의 방학 활동의 일부는 마땅히 독서에 바쳐져야 하며, 그 실천을 위한 세부적인 독서계획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 독서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관건이 될 것이다.
먼저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제일 간편한 방법으로는, 현재 자신이 흥미를 느끼고 있는 관심 분야의 재미있는 책을 골라서 읽는 것이다. 독서의 기본은 즐거움에 토대하는 것이므로 자연스레 손이 가고 눈길이 머무는 책부터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흥미 위주의 독서만으로는 책 읽기를 오래 지속하기는 어렵다. 거침없는 속도에 비해 독서 후의 공허함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 만화책이나 무협의 세계에 한번쯤 빠져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는 바이다. 그런 책들은 우리가 삶의 소중한 동반자로서 삼을 만한 것이 못된다. 대학 시절 에는 무엇보다 읽는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고전 독서에 힘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기계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대략 고전과 베스트셀러의 독서 비율을 7:3 정도로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는 현재의 시간에 속해 있는 존재들이므로, 지금 움직이고 있는 현실의 이슈와 민감한 트렌드를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현재 삶의 긴박한 문제들을 대변하고 있는 베스트셀러나 화제가 되고 있는 책들을 무시할 수 없다. 종종 대형서점의 목록을 주의 깊게 살펴서, 읽을 만한 책들을 선별할 수 있는 안목을 평소에 길러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베스트셀러들은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해지는 것들로, 과격하게 말해 출간 즉시 쓰레기가 되어가는 책들이다. 이에 비해 고전은 오랫동안 시간의 부식을 견뎌낸 책들이다. 그것은 현재에도 여전한 가치를 인정받아 살아남은 것들이다. 고전을 통해 우리들은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옛사람들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 그런 뜻에서 세계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인식의 확장을 실험하는 사람에게, 고전은 더할 나위 없는 벗임이 틀림없다. 나의 경우 책을 선별하는 기준의 하나는, 그 책이 적어도 30년은 버틸 수 있는 내구력을 지녔는지 하는 점이다. 1년도 채 견디지 못하고 휴지조각으로 버려지는 수많은 책들을 우리가 애써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편 목적이 인도하는 분명한 방향성과 <왜>라는 가치물음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자기계발서의 미만(彌滿)이 끼치는 정신적 해독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것은 제 영혼을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지금, 시급히 해야 할 것은 통속적인 자기개발이 아니라 사람마다 복되게 지음 받은 바로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회복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대학생의 독서는 마땅히 원전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최소한 원전의 우리말 번역본, 그리고 가능하다면 번역서보다는 원전이 되는 외국어 텍스트를 직접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주변에는 2차서를 몇 개 읽은 것으로, 필자나 그 이론에 정통한 것 마냥 떠들어대고 한 줌의 얄팍한 지식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2차서는 다만 2차서일 뿐이며, 결코 원 텍스트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특정한 필자의 특정한 관점으로 해석된 하나의 사본(寫本)으로서, 원전으로부터는 그만큼의 거리와 함께 불가피한 오류의 가능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읽고 이해한 것도 아니면서, 2차서를 유식의 증거로 과시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신의 지적 타락을 뚜렷이 증거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에누리 없이 책 읽기의 유일한 방법은 공을 들여 천천히 정독하는 것이다. 공들여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다. 시중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나쁜 책들의 사례는 가령, ‘하룻밤에 읽는~’, ‘일주일 만에 끝내는~’ 따위의 제목들을 달고 있는 것들이다. 세상의 어떤 지식체계도 단 하룻밤이나 일주일 만에 이해할 수 있는, 만만하거나 허술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독자를 현혹하는 얄팍한 상술이자 엄연한 지적 사기이다. 한 예로서, A. N. 화이트헤드가 68세에 완성한 만년의 대작,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1929) 같은 책은 이해에 앞서 읽는 데에만 최소 6개월가량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통스러운 메마름의 과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얻어지는 지적 희열은, 좋은 책만이 제공해줄 수 있는 빛나는 감각의 환희이자 눈부신 삶의 축복이다. 독서를 통한 정신적 충만감이 곧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되지 않는 것이기에 그것은 돈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책은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끝으로 한 권의 독서는 그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책들 사이의 관계의 지도와 맥락의 질서를 나름대로 구성해볼 수 있어야 한다. 즉 각각의 필자들 간의 영향관계와 그 이론적, 실천적 계보를 직접 작성하는 것이 가능해질 때, 독서의 경험은 세계를 조망하는 개성적 인식의 틀이자 고유한 지식 체계로서의 면모를 점차 갖춰가면서 비로소 완결되는 것이다. 대개의 학문의 지적 체계는 원리론(체육철학)-단계론(체육사)-현상분석(스포츠마케팅) 등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이러한 학문의 짜임관계를 촘촘히 엮고 견고하게 구성함과 동시에, 하위 분과의 세부적 차이들을 정교하게 갈피 짓는 매우 섬세한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함께 거시적 안목으로서 전체를 통찰하는 직관의 힘이 필수적임은 물론이다. 책 읽기라는 지난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존재의 거멀못으로 이룩되는 관계의 완강한 그물망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