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부쳐(An die Poesie)
등단 9년 만에 첫 평론집을 묶는다. 개인적으로 적지 않은 세월이었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등단소식을 들은 지 보름 만에 가까웠던 친구를 떠나보내야만 했었고 사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등단 즈음의 기억은 그렇게 복잡하며 다감했던 것이다. 소설을 전공하였으나, 시 평론으로 등단하려고 마음먹었었고, 결과적으로는 소설 평론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평론가와 연구자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속된 대로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연구자로서도 대개의 방향을 잡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평단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었다. 이대로 평론활동을 접어야겠다는 찰나에 우연한 기회로 시 평론을 쓰게 되었고, 최근까지는 원하던 대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었다. 3년 남짓 시 평론을 쓰면서는 참,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었다. 시와 시인들의 속살과 밑뿌리들을 만지작거리는 일은 내 자신의 은밀한 구석과 바닥까지를 훑는 일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로 불편한 기억들의 환기로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깊이 비어 있어서 충만한 적멸(寂滅)의 경험을 안겨주었다. 나는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경이로운 내면의 확장을 우두커니 지켜보곤 했다. 그것이 내게는 <실재의 언어: the language of the Real>로서 시와 만나는 일이었다.
정신분석이 제시하는 ‘실재(the Real)’의 개념은 인간이 가닿을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의 무의식의 기원 같은 것으로도 이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탐색하는 시적 작업과도 맞먹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끝에서 마침내 발견하는 것은 궁극적 무(無)이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삶 깊숙이 내재된 겸손과 사랑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아든다. 궁극적 무(無)로서 실재와 마주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체험이지만 누구라도 실재와 대면함 없이는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없다. 나는 시의 언어가 실존적인 것이든 역사적인 것이든 은폐된 진실에 다가서려는 시도라고 생각하며, 그런 뜻에서 실재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가 우리의 삶과 깊이 얽혀있는 한, 시 읽기의 과정은 마찬가지의 월경(越境)의 경험으로 독자를 이끌 것이다. 하여 그것은 존재의 은밀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제1부에서 제4부까지는 비교적 최근 썼던 시 비평을 그러모은 것이고, 제5부는 등단 이후 썼던 소설 비평 중에서 선별한 것이다. 나의 첫 평론집은 사실상 시 비평집으로 묶인 셈이다. 제1부는 시 장르의 문제나 시 의식 등의 원론에 가까운 글들을 한데 모았다. 제2부는 시에서 리얼리티의 문제를 주로 서정시와의 관계 속에서 다룬 글들이다. 제3부는 삼간(三間: 人間 · 時間 · 空間)으로 지칭되는 관계의 동역학이 시작(詩作)에서 구현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다. 제4부는 2010년대 전후로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신작시들에 대한 현장비평 성격의 글들로 이루어졌다. 제5부는 소설 비평들만 따로 모은 것으로, 등단작인 김애란론과 2000년대 이후 희극적 소설의 계보와 미학적 원리를 구명하는 글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수지가 맞지 않음에도 출간을 허락해주신 케포이북스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편집과 교정을 맡아주신 편집부 여러 선생님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제 내가 잘 알고 있는 벗들에게, 그리고 더 많은 익명의 벗들에게 이 작은 책을 전한다. 무엇보다 쓸모없는 문학과 시의 힘을 여전히 믿고 있는 어린 벗들에게 바친다.
2016년 10월 18일
짙어가는 가을 오륜동 연구실에서
이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