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발화와 꽉 찬 발화1)
-시에서의 의미와 상징화 작용
1.
널리 알려진 대로 기표가 기의에 가 닿지 않는다는 것, 기표와 기의의 대응관계를 투명한 상호조응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언어학의 공준(公準)을 뒤집은 탈구조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를 정신분석의 명제로 정식화한 사람은 라캉이었다. 그에 따르면 기표는 기의의 표면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이탈한다. 따라서 기표를 단일한 것으로 확정할 수 있는 의미의 고정점(anchoring point)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종지부를 갖지 않는 의미의 산종(散種)이 개시된다. 한편으로 시의 모호성, 급진적 무의미화 경향은 난해성과 함께 현대시의 특징적인 모습으로도 간주된다. 주지하듯 그것은 김춘수의 시작(詩作) 이래 한국 현대시의 주도적인 양상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는 시인들의 의도적 작시의 결과이기도 하며, 시작의 과정 속에 비의지적으로 기입된 것이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한국시의 전개에서 이러한 경향은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시가 더 이상 상품양식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 역사적 상황, 보다 직접적으로는 상품의 소비자로서 독자의 기호나 취향의 고려라는 가독성의 문제가 시인 자신에게는 한층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문화사적 전환과 깊이 연루된 것이다. 시인들은 이제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예술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2.
박은정의 첫 시집 㰡”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㰡•(문학동네, 2015)는 우선, 최승자의 시적 파토스를 정당하게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듯하다. 무엇보다도 고통의 언어를 노골적으로 전경화하며 직접적으로 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용조차 새삼스런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찌기 나는」)라는 도저한 비관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아 있음이 누런 벽지로 빛을 바랠 때”(「토카타」)에서처럼, 박은정 시의 몇몇 구절들은 위 문장의 창조적 변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해 보인다. 다시 말해 박은정의 시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 또한 영원한 부재증명 혹은 근원적으로 어긋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작품은 이와 같은 세계인식을 여실히 표현한다.
눈을 감으면 이곳이 아니라 여기, 구름을 뚫고 올라간 파리의 현기증 같은 마음으로 어젯밤 본 환영의 목록을 말해 봐요 당신의 무릎을 베고 읊조리던 오후의 기이함이라든지 줄거리가 없는 영화처럼 내내 달아나던 골목이라든지, 당신을 돌 때마다 공중이 멀어지고 근육은 단단해지고, 당신은 도처에 널린 알리바이인가요 빈민굴의 개처럼 쫓아오는 빛줄기들, 방향은 룰이 되고 공포가 되어 입술을 벌리면 해서는 안 될 말을 지껄이고 있어요 날개가 돋을 때까지 한 걸음씩, 당신을 따라가면 당신이 아닌 내가 당신이 되어, 문을 열면 사방은 텅 빈 공백,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사각의 세계, 이곳이 아니라 여기, 지친 발목을 내려놓고 처음처럼 발톱이 돋을 때, 문득 돌아보면 사라지는 행방들
-「정글짐」 전문
화자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추상적 공간으로서 “이곳”(this place)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리적 현존의 장소로서 “여기”(here)이다. 지금-여기의 삶과 세계가 문제적인 것이다. “당신”의 존재는 부재증명으로서 “도처에 널린 알리바이”이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없다. 당신의 실체를 무엇으로 단정할 순 없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는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간극, 무엇으로도 좁혀지지 않는 괴리감이 있다. 그것은 “문을 열면 사방은 텅 빈 공백,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사각의 세계”라는 명시적 진술 속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정글짐’으로 표상될 수 있는 “텅 빈 공백”의 세계, 공포스러운 부재의 감각이다. 형태상 정글짐은 실체는 사라진 채 뼈대만 앙상히 남아 있는 유령의 구조물이다. 정글짐에서 손발을 옮겨가며 느꼈던 아찔한 현기증과 순간적 낭패감은 유년의 뜰에서 누구나 경험해본 바일 것이다. 잠시라도 방심하여 발을 헛디딘다면 지상으로의 추락을 막을 수 없다. 모름지기 시인에게 세계는 그러한 ‘정글짐’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시집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존재론적 열패감과 절망적 상황인식, 만연한 공포와 씻을 수 없는 불안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요컨대 세계는 “돌아보면 사라지는 행방들”, 존재의 흔적이 지워지고 자취를 감춘 상태로서 부재의 장소이다. 이상의 근원적 어긋남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비교적 화자의 주관적 시야를 넘어 보다 객관화된 작품으로, 다음 시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가 떠난 뒤
그는 책상 위 편지를 읽었다
열매가 벌어지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필체는 심해 속 물고기처럼 고요히 떠 있었다 어둠 속 어둠과 함께 몸을 섞으며 번지는 글자들
창밖으로 가끔씩 뼛조각 같은 달빛이 비치기도 했지만 거대한 어둠은 정화되지 않고
잠이 들면 도시가 물에 잠기는 꿈을 꾸곤 했다
아내는 떠다니고 있었다 썩은 과육처럼 짓무른 얼굴로. 그런 밤에는 심장이 딱딱해질 때까지 아내의 문장을 곱씹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버린 망원경 속에서 태어났어요 서로를 볼 수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적막한 빛의 세계 속에서 소각되기 위해 태어난 미물들
아내는 자신의 껍질을 모아 태우곤 했다 수북한 연기 속에서 어떤 문장을 주문처럼 반복하며
여보, 열매들이 썩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기괴한 빛이 우리를 망치고 있어요 혀를 내밀며 조금씩, 우리가 우리를 조금씩
달고 시큼한 냄새가 온 집에 역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아내의 불면보다 더 집요한 기세로
과일들은 시들어갔다 조금씩 물러지는 부분을 손톱으로 눌러 터트리면 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렸다
가끔씩 바다 위에서 비행기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아내의 이름은 없었다
과일 껍질을 태우면 검게 변색한 아내의 속살이 거기 있었다 슬픔으로 가려움을 달랬다던 아내의 푸석한 얼굴이 슬픔도 없이 타고 있었다
-「아내의 과일」 전문
마치 소설을 읽는 듯 뚜렷한 서사적 상상력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이 작품은, 이번 시집에서 다소 이질적인 위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다른 시편들이 대개 화자의 맨얼굴을 굳이 감추려 들기보다는 내면의 발화를 직정적으로 토로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침없는 가면의 위장술이 보편적인 현재의 시단에서, 시인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활용하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무엇보다 위선적이며 기만적인 태도라 여기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도 박은정은 매우 정직하고 성실한 시인일 것이다. 눈에 띄듯이 이 시는, 남편과 아내를 등장인물로 설정해놓고 있다. 또한 눈에 띄는 것은, “아내”의 문장 속 발화를 기울임체로 표기하여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전언과 전체적 메시지 역시 이번 시집의 일관된 주제의식과 통일된 이미지를 헤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매우 참신하고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 속에서 극적인 형태로 보다 객관화되어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내”가 돌연 행방을 감췄다(이와 같은 이미지는 앞선 작품의 마지막에서도 두드러지는 인상임을 상기할 수 있다). 남편은 아내가 남긴 편지, 그녀의 흔적을 하나하나 읽는다. 아내의 불면의 원인, “열매가 벌어지는 소리”는 단적으로 세계의 파열음이다. 존재의 균열과 파국을 암시하는 대목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거대한 어둠은 정화되지 않”는다. 아내는 “썩은 과육처럼 짓무른 얼굴로”, 해저(海底)와 같은 밤을 유령처럼 떠다닌다. 아내의 두 번째 문장에서, 인간의 태어남 자체가 궁극적으로 원죄임이 누설된다. 누구나가 “소각되기 위해 태어난 미물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자신의 껍질을 모아 태우곤” 했던 것이다. 마침내 “열매들이 썩”기 시작한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기괴한 빛이 우리를 망치고 있”다. 이어지는 마지막 행의 문장, “과일 껍질을 태우면 검게 변색한 아내의 속살이 거기 있었다”는 진술은, 아내의 가출을 불가피한 필연적 사건으로 규정하도록 만들고 있다. 과일의 부식처럼 아내의 내면성이 제거되고 있었고, 존재가 희미해지도록 본래성의 상실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내의 과일”은 차츰 고유한 빛깔을 잃어가는 아내의 현존재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이자, 시인의 창조적 직관이 빚어낸 개성적 이미저리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박은정 시의 보다 본질적인 차원으로 육박해가기로 한다.
박은정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반복적 이미지는 ‘아이’와 ‘어른’의 모티프이다. 이는 시집의 제목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구절들을 뽑아 간추려본 목록은 다음과 같다. <“평생 인형의 얼굴을 파먹으며/배고픔을 달래는 아이”(「대화의 방법」),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나고야의 돌림노래」), “쫓기던 아이들이 절벽을 뛰어내리고”(「풍등」), “아이들이 버린 운동화가 떠다니고 주인 없는 인형들이 발견되기도 했지만”(「아스파라거스로 만든 인형」), “수줍게 손을 잡은 불운한 소녀들”(「불행의 접미사」), “난청을 가진 아이는 어른이 되자/울 때마다 녹물을 흘리는 여자가 되었습니다”(「녹물의 편애」)>. 그의 첫 시집이 갖는 의미와 위상은 아마도 여기, 어디쯤에서 결정될 수 있을 듯하다. 인용한 시구들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것은, <불운한 소녀들>이 될 것이다(어떤 면에서 박은정의 첫 시집이, 김행숙의 㰡”사춘기㰡•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점에 연유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또한 분명히도, “불운한”/ “소녀들”일 것이다. 즉 ‘불행한 소녀들’과 함께, ‘소녀들의 불행’에도 똑같이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논의의 효율을 위해서는 불행의 나머지 표지들도 마저 그러모아두는 것이 좋을 것으로, 또한 다음과 같다. <“갈라진 심장을 가진 자”(「고양이 무덤」), “너는 허공 위의 먼지가 되고 바닥에 닿는 허무가 된다”(「피아노」), “이만큼의 액운으로 가득한 것을”, “흉측한 단어들에게 잡아먹히는 꿈을 꿔요”(「드로잉」), “피가 묽어서/마음이 둘로 쪼개지는 사람들”(「이방의 사람」), “나의 사주는 내가 아픈 만큼의 평화”(「사루비아」), “무심히 빛나는 가시들//나는 자주 문장의 행로를 잃어버립니다”(「윤색」), “절반만 완성된 불행에 광을 내는 이들의 이름을 연인이라 부르자 꽃잎을 수의처럼 입고 뛰어가는 아이들”(「봄밤의 연인들」)>. 그렇다면 이쯤에서 최후의 물음을 던져보기로 한다. 소녀들은 ‘왜’ 불행한 것인가. 그 실마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나는 소녀의 몸에서 태초의 음을 꿈꾸었지만 실패한 자”(「피아노」), “당신의 유일한 재능은 당신을 닮은 창녀를 낳은 것”(「미토콘드리아」), “차가운 네 뱃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이방의 사람」), “맨발로 춤을 추던 성녀들이 창녀가 되던 계절”(「우리에게도 아픈 전생이」), “나는 건기에 죽은 어미의 뱃속을 박차고 나와 하릴없이 지는 꽃이나 보며 울었던 것인데 이곳은 어디입니까”(「귀령(歸寧)」), “어머니, 몸뚱이를 돌려주세요/공중으로 날아간 사지에/뜨거운 성수를 뿌려주세요”, “하얗고 더러운 것들을 화해시키며/저는 이만큼 왔습니다”(「마한델바움」) 등의 구절들이 이에 해당한다 하겠다. 결론부터 말해 그것은 버진 머더(Virgin Mother; “소녀의 몸에서 태초의 음을 꿈꾸었지만”)의 문제이다. 요컨대 ‘성장’의 다른 의미는 ‘순수’의 상실과정, 사회적 타락의 과정일 것이다. 주지하듯 라캉은 아버지의 법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규범체계를 상징계(the Symbolic)로, 어머니와의 이자관계로 대표되는 상상적 동일시 단계(흔히 거울단계로 명명되는)를 상상계(the Imaginary)로 부른 바 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단계라 할 수 있는 상징계로의 진입은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불가피한 숙명으로 보았다. 즉 성장의 과정에서 도덕의 내면화나 상징계 질서로의 편입은 배제될 수 없는 상수(常數)로 간주된다. 결론적으로 성장의 문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단지 상상계에의 머무름을 통한 자기순결의 보존이나, 상징계 질서로의 순응과 고착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어떤 면에서는 매우 용이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난망하면서도 보다 핵심적인 사안은, 상징계 질서를 수용함과 동시에 자아의 순결성을 여전히 고수하는 바, 이중적인 과제라 할 것이다. 가령 그것은 성모(聖母)로 표상되는 버진 머더(Virgin Mother)의 문제, 진흙 속에 홀연히 피어오르는 연꽃의 이미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개인적 성장의 문제는 성장의 가치와 이념을 실현하고 외재화할 수 있는 사회적 이념형의 발견 및 확인과도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인용 구절들에서 또렷이 환기되는 것처럼, 박은정 시에서 어머니(여성)의 이미지는 성녀(聖女)와 창녀(娼女)로서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의 총체적 이미지는 누항(陋巷)의 마리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균열과 간극이 곧 화자의 자기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상징계로의 진입과정에서 주체를 관통하는 내적 파열음과도 공명하는 것이다. 화자는 그러나, 그것이 결국에는 실패했다고,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고 토로한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상징적 대상화 작용의 실패, 은유적 차원에서는 기표가 기의에 적중하여 안착하지 못한 상태를 암시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다소 투박하게 표현하여 인간적 의식과 판단이 과도하게 개입된 상태, 자의식의 과잉 결정태로서 꽉 찬 발화의 성격을 갖는다. 위 여러 구절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누차 어머니의 자궁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은, 그 단적인 증거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은정의 첫 시집의 궁극적 귀결점은, 어머니와의 이자관계의 회복과 상상적 동일시를 통한 상상계로의 영속적 귀환이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시인 역시 이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의 현실적 불가능성보다는 그 구심적 에너지와 원환운동이 내포한 잠재적 성격에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언제든 현실의 원심적 에너지로 전환되어 시로 잉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군가 버린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나의 직업”(「윤색」)이라는 시인의 뚜렷한 소명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결국 문제는 박은정의 시적 파토스가 내장한 에너지의 크기와 밀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에너지의 깊은 열도가 장래의 시단을 풍요롭게 할 것으로 확신한다. 다른 무엇보다 “나는 무서워서 자꾸 사랑을 합니다”(「녹물의 편애」)라는 말로 요약될 법한, 그녀의 언어가 너무 절절하게 깊숙이 심장을 헤집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3.
송승언의 첫 시집 㰡”철과 오크㰡•(문학과지성사, 2015)는 여러모로 매우 유니크한 시집이다.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어서, 가령 카프카의 㰡”성㰡•이나 김종삼의 초기시들, 그리고 이후 김현에 의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명명됐던 기형도의 시들을 떠올리게 한다. 일단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특징은 시집의 해설자가 적절하고 언급한 것처럼, 의미의 미니멀리즘이다.2) 분명히 송승언의 첫 시집은 뜻 모를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우선 그것은 각각의 시의 제목이 내용과는 별다른 연관성을 갖지 않는 것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여기에서 그것의 의미를 최대한 윤색해보고, 그것이 결국 무의미로 귀결되는 것이라면 그 함의와 위상 등을 점검해볼 요량이다. 논의의 단초로서 다음의 인상적인 작품을 인용하기로 한다.
잎과 가지 너머 많은 잎과 많은 가지 그 너머 보이지 않지만 길이 있지 그 길가에 많은 잎과 많은 가지가 있다 보이지 않는 길로 보이지 않는 차가 지나가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 벤치에 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열리지 않는 창고에서 말이 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난다 내용이 없는 수업이 있고 아무도 없는 교실이 있다 반쯤 걷힌 블라인드에 가려진 잎과 가지가 있다 많은 잎과 많은 가지 그 너머의 잎과 가지는 간격을 잃고 울고 있다 그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 것
-「피동사」 전문
여기에서도 현저히 드러나듯이, 송승언은 반복의 수사를 시작의 중요한 원리로 삼고 있다.3) 사실 이 작품은 거의 반복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시의 의미구조는 “잎”과 “가지”가 무한히 반복 · 증식되면서 얻어지는 차이의 효과로 집약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표가 지시하는 기의의 텅 빔과 의미의 진공상태(대표적으로 “내용이 없는 수업”이라는 진술)가 이 작품의 핵심적 전언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이 시는 송승언 시작의 핵심원리와 기본 테마,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간명히 압축되어 있다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의 하나는 비가시적인 것으로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화자 혹은 시인은 왜 비가시적인 것들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미리 말해 그것은 인간적 의식과 판단, 상징적 의미화 작용으로는 파악되지 않거나 배제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 속에 분명히 암시되고 예견되고 있다 하겠다. 이상의 뜻에서 예컨대, “어둠 속에서 나는 감각만을 익혔습니다”(「나타샤」)라는 진술 등은, 의식을 축소한 판단중지의 상태, 초연한 내맡김 속에서의 소극적 수용력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이어지는 맥락에서 다음 작품을 검토하기로 한다.
오랜 만에 공원에 갔어 다듬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자주 보던 금잔화를 보려고 했지 그런데 그곳에 금잔화는 없었다
노란 게 예뻤는데 벌써 철이 지난 거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철없는 사철나무도 마가목도 청자색 수국도 없었다
주인이 죽어 주인 없는 개도 없었고 아무도 없는 정자도 없었지 공원을 뒤덮는 안개도 없었다 모든 것이 흐린 공원이었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뚜렷이 잘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명징한 공원이었다
배후에서 갈라지는 길이 보이지 않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전문
하나의 거대한 역설로서 이 작품은 송승언 시의 핵심 테마를 가장 깊은 곳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있다. 먼저 그것은 마치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의 운명처럼, 가장 깊은 진실은 눈을 감아야 보인다는 역설적 진리를 떠올리게 한다. 시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화자는 “자주 보던 금잔화”를 보러 공원에 간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그곳에 금잔화는 없었다”는 구절에서, 이후의 진술 내용은 어느 정도 예견된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연은 송승언 시의 특장의 하나인 반복의 기법이 언어유희 속에서 유감없이 구사되고 있다. 3연은 부정적 진술의 반복을 통해 시적 테마를 확장하며 심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마지막의 “모든 것이 너무나 뚜렷이 잘 보인다”는 판단적 진술은, 이어지는 “아무것도 없는 명징한 공원이었다”는 역설적 진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여기에서 핵심적 사안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술과 “명징”하다는 진술이 의미상으로 배치되는 모순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일 것이다. 사전적으로 ‘명징성(明澄性)’은 밝고 맑아 또렷이 잘 보이는 상태로서 시각적 대상을 이미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시각적 대상으로서 무엇도 포착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켜 ‘명징하다’, 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리 언급된 것이기도 하지만, 삶의 역설적 진실로서 의식과 판단의 축소화를 통한 직관적 통찰, 이로 비롯한 사물의 본래성의 회복이다. 또한 그것이 인간의 인위적 가치판단을 제거하는 의식의 정화(淨化) 및 명징화의 과정이라는 점은, “배후에서 갈라지는 길이 보이지 않은”이라는 구절에서 적실한 표현을 얻고 있다 하겠다. 즉 사물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인식의 분화 지점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의식을 지움으로써 얻게 되는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를 간명한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상의 테마는 「돌의 감정」 같은 작품에서도 적절히 변주되고 있는데, 가령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애초에 배운 게 없으니 어떤 사물에도 레테르를 붙이지 않기로 오늘 식단에 대해 침묵하기로 음식이 어떠했더라도 그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므로”라는 표현 등에서 보다 심화된 표현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선악의 분별 등은 사실 인위적 가치판단으로서, 자연물이나 사물 등은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인간적 내용도 갖지 않는 것이다. 화자는 어떤 선입견도 없는 상태에서 사물의 민낯과 마주하고 그것의 고유한 속성들과 맞닥뜨리고자 한다. 즉 “돌의 감정”을 배우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무한한 의미작용만이 있을 뿐, 대상화된 사물로서 상징적 의미화로의 고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끝없이 열린 개방적 상태이자 ‘텅 빈 발화’로서의 위상과 성격을 지닌다.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인간적 의미화 작용 혹은 상징화에의 거부와 저항이 㰡”철과 오크㰡•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송승언의 첫 시집에서 유난히 반복되는 모티프의 하나는 어떤 명령체계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채찍이 등을 후려쳤습니다 “일하라. 멈추지 말고 일하라. 그분이 오신다.”>(「이장(移葬)」) 같은 구절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기형도의 「전문가」4) 같은 시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분명히 있는데, 끝으로 이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상징질서의 기본적 토대는 주지하듯 근친상간의 금지나 명령 따위의 규범체계들이다. 그리고 주지하듯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그것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관료제의 경직성에서이다. 「심부름」, 「환희가 금지됨」, 「증기의 방」, 「내 책상이 있던 교실」, 「카논」, 「이장(移葬)」 등에 등장하는 “당신”이나 “그분”은 비명시적 존재로서 화자와는 명령체계 속에 놓여 있다. 다음 시를 살피기로 한다.
흙을 판다. 명령이 있었으니까. 삽을 들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깊이만큼, 판다. 그보다 더 판다. 지나치게 깊숙이 파고 있다. 어둠이 들지 못할 만큼 깊숙이 파야겠다. 판다.
또 판다. 그만 파라는 명령이 들린다. 그래서 더 판다. 물 흐르는 소리 또렷할수록 우리는 명령에 근접하는가. 아니다. 살 썩는 냄새가 난다. 명령은 들리지 않는다. 삽 소리 들리지 않는다. 멈춘다. 멈추지 않는 소리가 들린다. 숨을 파내려는 듯 깊어지는 나로부터 굴이
-「심부름」 전문
남성 독자라면 이 작품으로 상기하게 되는 것은 먼저 군대에서의 무의미한 반복노동일 것이다. 군대에서 이런 경험은 한번쯤은 누구나 해봤던 바다. 그것은 하루 종일 땅을 판 바로 다음날 그 땅을 다시 메꾸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의 난처한 마음 같은 것이다. 이 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비교적 명료한 편은 아니다. 다만 시인은 상징질서의 가장 첨예하고 타락한 형태로서 군대 등의 관료제의 비합리성과 무자비한 폭력성을 고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인위적 시선과 인간적 가치판단을 가능한 축소하려는 일관된 시인의 무의식적 지향성이 자연스레 녹아든 것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시작의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은,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성, “칠판의 고요에 귀를 기울이면”(「카논」)에서와 같은 사물들의 맨얼굴들이다. 나는 이와 같은 송승언의 개성적 성취가 첫 시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시적 대상과의 암묵적 거리 확보를 과감히 벗겨내고 사물들 속에서 사물을 발견하는 즉자적 위치의 설정도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췌언으로 덧붙인다. 발화의 한 형태로서 텅 빈 발화는 궁극적 무의미, 의미의 진공상태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4.
지금까지 지난 계절 발간된 두 권의 첫 시집을 중심으로, 시에서의 의미와 상징화 작용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두 시인 모두 상징화 작용에 대해 반대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발화의 구체적 양상에서 박은정은 인간의 상징체계를 타락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아의 내면성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입장이라면, 송승언은 인간적 상징화 작용의 인위성과 그 조작적 성격을 거부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박은정의 시가 상징계 질서에 대한 대항담론으로서 고통의 언어를 날것으로 현시하며 세계를 자아화하는 꽉 찬 발화라면, 송승언의 시는 상징체계 전체의 무상성을 폭로하며 의미의 진공상태를 발생시키는 텅 빈 발화라 할 것이다. 다만 송승언은 인간적 시선에서 왜곡된 의미화를 거부하는 것이지 의미화 자체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해 그의 시는 본질적 차원에서의 의미화, 사물들의 고유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정당한 의미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의 시가 유독 비가시적인 것들의 속성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인도되고 있는 두 시인의 개성적 언어실험이, 고착된 상징체계의 영토를 돌파하여 한국시의 새로운 의미의 논리를 창안해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각주
1) 주지하듯 이상의 명명과 개념은 라캉의 이른 바 ‘로마 강연’, 「정신분석에서 빠롤과 랑가쥬의 기능과 영역(Fonction et champ de la parole et du langage en psychanalyse)」(1953)에서 구체화한 것이다. 라캉의 ‘꽉 찬 발화(full speech; parole pleine)’와 ‘텅 빈 발화(empty speech; palole vide)’는, 하이데거의 Rede(담론)과 Gerede(수다) 사이의 구별을 보다 정교화한 것이다. 꽉 찬 발화는 언어의 상징적 차원을 표현하는 반면, 텅 빈 발화는 언어의 상상적 차원을 지시한다. “꽉 찬 말은 의미가 채워진 말이다. 텅 빈 말은 단지 의미작용만이 있는 말이다”(Lacan, 1976-7; 딜런 에반스, 㰡”라캉정신분석사전㰡•, 김종주 외 역, 인간사랑, 1998, 117쪽에서 재인용). 라캉은 이를 임상분석의 치료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는데, 여기에서 나는 이와는 다소 다른 내포를 갖는 개념으로 차용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세부 정의로서, ‘꽉 찬 발화’는 상징적 의미화 작용의 일례로서 인간의 의식과 판단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언어적 표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텅 빈 발화’는 상대적으로 인간의 의식과 인위적 판단이 비교적 덜 개입된 언어적 표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2) 이 시집에서 매우 드물게 예외적으로 의미의 직접적 성격이 비교적 명시된 작품으로는, 다음 시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여느 평범한 시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관습화된 이미지의 상투적 문법으로 해독이 가능해 보인다(물론 연속적 단문의 끝의 종지부로서 마침표를 이어가고 있는 구성은 다소 이채로운 점이며, 연관적 의미화의 요체가 의미의 공백과 진공 상태[“텅 빈 극장의 내부”]로 귀결되고 있는 점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모르는 채. 각자의 손에 각자의 팝콘과 콜라를 들고. 이제 어두운 실내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의자를 찾아서 두리번거리지. 각자의 연인에게 보호받으며. 동공을 크게 열고, 숨을 잠깐 멈추고.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볼 것이다. 우리가 함께 본 적이 있는. 어둠 속에서 사건들은 빛나고. 얼굴의 그늘을 밝히고. 우리가 잊힌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팝콘 한 움큼 쥐려다 서로의 팝콘 통을 잘못 뒤적거리고. 손이 엇갈릴 수도 있겠지. 영화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는 채. 깊이 없는 어둠으로부터. 너와 나는 혼자 나올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그때 너와 나는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보게 된다. 한 손에 빈 콜라병을 들고서”(「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전문). 이상의 맥락과 관련하여 시인이 상투적 이미지와 시작(詩作)의 클리셰를 의도적으로 위반하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다음 작품에서도 명시적으로 확인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의 익사체로 남은 천사들이 한강으로 날아와/성산대교니 행성이니 하는 것들을 부수고 있었다/멋진 광경이었다//이미지가 지루해지면 집으로 왔다”(「망원」 전문).
3) 그것은 가령, “아침이면 의자에 앉아 숲의 저편을 본다 저기 보이는 참나무 참나무 그리고 참나무”(「숲 속의 의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거나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여름」), “지난밤 당신과 나의 꿈이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베꼈거나, 베게를 바꿔 벤 탓이겠지요”(「이장(移葬)」),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밤이 오고 잠도 오는데 인가는 보이지 않고/알 수 없이 해변만 밤을 밝혔다//할 수 없이 바다 생물의 사체도 주워 먹고”(「유형지에서」)와 같은 구절들에서 효과적으로 변주된다. 송승언 시에서는 동일한 어구의 직접적 반복이라도 단순한 반복 이상의 효과와 흥미로운 뉘앙스들을 창출해낸다. 아마도 그것은 미세한 차이를 통한 언어의 효과적 변형, 그리고 독서의 호흡에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운율감의 형성과 관련되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세심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4) 편의상 마지막 연만 인용해두기로 한다. “어느 날 그가 유리 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묵묵히 벽돌을 날랐다”(기형도, 「전문가(專門家)」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