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리얼리티
1. 시적인 것의 현실성
시와 리얼리티의 문제는 이미 말해진 것으로서 낡은 상투성과 함께,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서 잠재적 개방성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의도하는 것은 전래의 고전적 규범으로서 리얼리즘을 재론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껏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리고 추가하거나 포함해야 할, 어떤 ‘시적인 것’의 새로운 영역이 발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으며 그 내용과 질은 무엇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집약될 것이다. 여기에는 시적 대상이자 실제로서 현실과 현실적인 것, 그리고 이로부터 기원하는 시의 현실성(actuality)이 무엇인지가, 우선 충분히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미리 간추리자면 시의 현실성은, 표상작용의 객관적 개연성과 결부된 협의의 리얼리티로서(써)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아직 발현되지 않은 가능태로서 잠재성(potentiality)을 여일하게 포괄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시가 그 내포적 속성으로서 비가시적인의 가시성을 본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적 사유의 열린 구조 속에서 시적 진실은 아마도 스스로를 체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양식으로서 포에지 혹은 시적인 것이란, 잠정적으로는 <실재(the Real)의 형식>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사이의 현상학 혹은 현실과 환상의 이중주
오랜 침묵 만에 발간한 박덕규의 두 번째 시집, 㰡”골목을 나는 나비㰡•(서정시학, 2014)는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작가적 역량을 가늠해 볼만한 작품집이다. 제목으로 고른 ‘골목을 나는 나비’라는 말은 여러 가지 풍부한 함의를 거느리고 있거니와, 조어 자체만으로 그의 시 정신을 고스란히 집약해놓은 것이기도 하다. 미리 말해두어 그것이 푸른 하늘이나 창백한 허공이 아니라, 왜 ‘골목’인지가 이 시집을 해명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랜 작가적 수련을 통해 얻어진 말의 공력과 내적 깊이다. 다시 말해 사물과 대상을 섣불리 단정하거나 그 의미를 서둘러 확정하기보다는, 에둘러가는 말의 힘을 통해 포착된 시적 대상을 이리저리 공글려 보는 노련함과 여유가 돋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지난한 삶의 경험들로부터 아득한 우물처럼 길어올려진 것이다. 가령 “사람의 갈비 속/기억을 쌓는 창고가 있어/그 문을 열면 썩은 곰팡내”(란강의 추억」)나 “우리 몸 켜켜이 쌓인/시간의 지층”(「멱」) 틈새로, “추억은 까까머리 마른버짐/추억은 김치국물 번진 도시락/추억은 지뢰 아래 묻힌 삼팔선”(「잉카」)이라는 진술들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골목 · 1」의 구절처럼, “거기서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시집의 제1부와 4부를 중심으로 오랜 가족사의 겪음과 핍진한 가족애, 그 아련한 추억과 기억의 편린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가족의 역사」, 「둥근 사이」, 「땀띠」, 「독서」 같은 작품들이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 거기에서 시인이 보는 것은 일차적으로 끈끈한 가족애나 모성의 그리움 같은 보편적 정서로서 가족됨의 ‘영광’ 자체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가족됨의 불가피한 ‘비참’에도 동등한 시선을 배분하고 있다. 가족됨이란 치유되지 않는 상처의 역사이기도 하다. 가령 바람난 남편의 무관심과 아내의 무정한 세월을 빗대고 있는 「갑작스런 성묘」나, 돌아온 탕자로서 가장에 대한 아내의 어쩔 수 없는 양가감정을 소재로 하고 있는 「염치 있는 상속」 같은 작품이,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마치 봄이 되면 어김없이 풀리고 마는 강의 결빙처럼, 가족들의 비행과 잘못을 속절없이 묵인하고 낱낱이 수용해야 하는 고통스럽고 무한한 화해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가족사의 성패는 어떤 면에서, 치욕스런 ‘적과의 동침’을 비교적 무난하고 견딜만한 것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구성원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시적 상황들은 분명히, 카프카의 「변신」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 있다. 이처럼 실존적 개인으로서 인간의 근본적 고독과 그 단자적 성격은 「샘물」1) 같은 작품 등에서 여실히 표현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 한층 가시화되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 어긋남, 그 관계의 숙명적 불모성이다. 예를 들어 아내와의 사소한 말다툼과 일상의 에피소드를 적시하고 있는 「명령 불복종」이나 「죄인」, 그리고 애인과의 벌어진 틈을 포착하고 있는 「귀여운 애인」 등의 작품들은 이런 주제와 직, 간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인의 ‘관계’ 혹은 ‘사이’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이에 바탕한 시적 사유2)는, 박덕규 시의 원형적 자질을 이루며 이번 시집을 두루 아우르고 관통한다. 이와 함께 그 전형이 거느리는 다양한 변형들 또한 풍부하게 생산해낸다. 가령 그것은, “그래서 떨어질 수 있는 사이야/그러나 멀어질 수 없는 사이야/그렇게 오래 걸어온 사이야”(「골목 · 2」 전문)에서처럼 변주되기도 한다. 한편 ‘사이’에 대한 사유는 관계론적 정의로서 제한되지 않고 보다 거시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 박덕규 시의 근간이 되는 현실 규정성에서 벗어나 환상과 환각의 세계로 시적 상상력을 도약케 하는 것이다. 약동하는 시어들의 환기력과 생의 이미지는 이를테면, 박덕규의 시를 현실과 환상의 이중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실의 구심력을 일탈하는 원심적 에너지는 이국적 체험을 전경화하고 있는 3부에서 좀 더 두드러지는데, 「북해도 붉은여우」, 「텐진 바닷가 배 만드는 노인」, 「인도 밤기차 1995 · 2013」 등의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열거된 작품들에서 순결하고 지고한 존재들은 어떤 영원성을 표상하는데, 그 훼손될 수 없는 불가침성이 순도 높은 이미저리를 얻은 작품으로 「텐진 만두」3)를 꼽을 수 있다. 이상의 논의에 대한 종합으로써 이제 시집의 표제작을 살피기로 한다.
나비 떼가 날아간 자리
허공에 긴 뱀 같은 자국이 남는다.
늦게까지 놀다가
내 이마에 앉았다 가는 나비도 있다.
나도 나비를 따라 대문 밖으로 나간다.
긴 골목길을 따라가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도
골목길이다.
길을 비켜 달라는 자전거 소리
채소 팔러 온 리어카
몰려다니는 동네 아이들
시장 갔다 오는 아낙네
그 사이를 나비가 가고
내가 간다.
때로 골목에는 나비와
나비를 좇는 나밖에 없다.
내가 날고
나비가 날 좇는 때도 있다.
골목이 일어나 나비를 좇고
내가 긴 골목으로 드러누워 있기도 한다.
나는 없고
나비 떼가 긴 골목이 되기도 한다.
모퉁이를 돌아
나비가 날고
골목이 날고
내가 난다.
큰길은 안 보이고
골목길이다.
-「골목을 나는 나비」 전문
시인의 분신이기도 한 ‘나비’는 이 시에서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게 하는 매개물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4연에 등장했던 현실의 규정력이 사라진 자리, 6연에 이르러 “나비”와 “나”만 비로소 남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또한 주/객의 경계마저 희미해진 이후 시상의 전개에서,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침내 화자는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비약을 꿈꾸게 된다. 그럼에도 마지막 연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큰길”이 아니라 “골목길”이라는 점은, 박덕규 시의 궁극적 지향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위태로운 허공이나 눈부신 창공이 아니라 지저분한 골목길, 세속의 누항이 그 귀착점이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의 시는 사유의 고공비행이 아니라 지상의 중력에 의해 일관되게 인도되고 있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겹의 시선과 복합적 사유구조를 통해 박덕규 시의 리얼리티는 보다 풍부한 표정과 함께 정제된 내적 깊이를 획득한다.4) 한편 환상을 촉발하는 비약적 상상력은 시적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과도 깊이 연루된다. 다음 작품은 현실과 환상 사이의 길항이라는 박덕규의 시 세계를 간명하게 응축하고 있는 시작(詩作)의 보고(報告/寶庫)이다.
거친 강물
흙탕물을 차고 치솟아 오른
잉어 한 마리가 있었어요.
그때 구름 뒤에 쉬고 있던
햇덩이가 살짝 눈을 뜨고 내려다보았죠.
순간,
잉어 비늘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사방이 환해졌어요.
잉어는 곧 물속으로 가라앉았지만
앝은 곳에서 놀고 있던 어린 고기들은
그 눈부신 순간을 잊지 못해
오래오래 몸살을 앓았어요.
-「탈출-탈북 화가 선무의 연작 그림 ‘탈출’을 보고」 전문
쉽게 알 수 있듯, 이 시는 현실이라는 지상의 중력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잉어’의 비상을 포착한 것이다. 이는 앞선 비행하는 ‘나비’의 이미지와 상통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시인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덕규 시작의 전모가 이 한 편의 우화에 집약되어 있다 해도 큰 허언은 아닐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의미의 중핵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내용인데, “황금빛으로 물”든 “잉어 비늘”이란 시적인 것의 개현(開顯)을 뜻한다. 시적 현현의 순간 새겨지는 일신상(一身上)의 진리와 존재론적 충일감은 시인의 변함없는 긍지일 것이다. 따라서 “어린 고기들”은, 아직 시인으로서 일가를 이루지 못한 혹은 여전히 자신의 시작이 불만족스러운, 결핍된 존재로서 시인 자신을 일컫는 말이다. 마지막의 “오래오래 몸살을 앓았”다는 진술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는 주체의 통각(痛覺/統覺)과 관련된 미래의 시작(詩作)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앓”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사이의 현상학이라는 박덕규 시의 여일한 주제를 재확인케 함과 동시에, 현실에 조응하는 환상의 영역을 매혹적으로 환치함으로써 시적 리얼리티의 차원을 확대하며 한껏 고양하고 있다. 덧붙여 박덕규에게 돌아갈 영원한 성소(聖所)로서 포에지, 그리고 모국어의 시간적 깊이는 「베개」, 「혀」 등의 시적 에피소드에서도 적실히 환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가 두 작품에서처럼, 당분간은 혀가 근질거려 밤잠을 좀 설쳐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3. 감각의 혁신 또는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성
민구의 첫 시집 㰡”배가 산으로 간다㰡•(문학동네, 2014)는, 의미의 정박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는 순정한 시의식의 소산이다. 그의 시작(詩作)은 환영 또는 환상에 의(거)하여 침투된 현실을 가시화함으로써 환영의 존재론을 뚜렷이 각인한다. 총 16편의 ‘방(房)’ 연작시와 9편의 ‘공기’ 연작시, 그리고 5편의 ‘동백’ 연작시를 배치하고 있는 시집의 특별한 구성은, 동일한 주제를 반복 · 변주함으로써 마치, 단일한 의미의 고정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위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의미의 다기한 분화와 그 무한한 산종(散種)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독립된 여러 편의 개별적 발화로 읽어도 좋고, 역설적으로 오직 단 한 편의 시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그 발화의 핵심적 전언은, 제목으로 차용된 말로서 <배가 산으로 간다>는 시적 명제이다. 이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옛말을 변형한 것이지만, 민구 시에는 말 그대로 사공이 정말 많다. 민구 시가 서정의 단일한 주체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 세계의 만상이 그의 시야(視野/詩野)에 들어온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가령 민구 시의 화자는 시적 대상에의 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텅 빈 주체로 세워둠으로써, 사물들이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는 활로를 개척해놓는다. 먼저 공기나 방에 대해서 언급해두기로 하자. 이는 모두 뚜렷이 존재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이다. 공기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방이라는 공간 역시 실제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질 없는 실재>로 현상하는 것이다. 이들은 있으면서 없는 것, 없으면서 있는 것으로서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라 할 것이다. 민구는 잘 알려진 적 없는 시적 주문을 통해 이 유령들과 시체, 나뒹구는 그 환영들을 하나하나 불러낸다. 따라서 그것은 출몰하는 유령들의 묵시록, 현상하는 환영들의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세목을 따져보기로 하자. 민구 시가 즐겨 사용하는 것은 유사성과 인접성이 비교적 떨어지거나 먼 사물들의 돌연한 병치이다.5) 이는 시에 붙인 제목들에서도 바로 드러나는데, 민구 시에는 제목과 내용이 그다지 상관이 없거나 직접적인 관련성이 비교적 드문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6) 민구 시의 이러한 작시법의 일단을 다음 작품에서 유추해보기로 한다.
거울 밖으로 나온 건 나였다
이어서 병풍 속의 새가
방안을 휘저었고
베갯잇에 새겨진 노송이
쿵 하고 침대로 떨어져서
잠들어 있던 아버지가 즉사해버렸다
시신을 거둘 시간이 없었다
컵에 고여 있던 물이
방에 차올랐기 때문에
그러자 냉동실에서 나온
불패한 연어가 방안을 헤엄치다가
방충망을 뚫고 사라져버렸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초들이
살림살이를 있는 대로 쳐부수며
물 빠진 바닥 위를 걸어다녔다
그들이 날개를 펴자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겨울인데도
선탠을 즐기고 온 듯 보이는 금발 여자가
이층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수챗구멍 속으로
깨끗하게 빨려들어갔다
빛바랜 사진을 보았지만
죽은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복덕방에 전화를 했다
더 큰 방을 구하기 위해서
-「房-탄생」 전문
일종의 메타시로서 이 작품은 민구 시의 사물들이 언어를 얻는 ‘탄생’의 과정이자 기실 민구 시 자체의 ‘탄생’ 과정에 대한 메타포로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여기에 소재로 차용돼 의미의 계열을 이루고 있는 사물들을 일단 열거해본다. 이는 <“나”-“새”-“노송”-“아버지”-“물”-“연어”-“화초”-“금발 여자”-“죽은 엄마”> 등으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의미의 연결고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지면서도 다시 끊어진다. 이미 언급했듯 그것은 인접성과 유사성이 비교적 먼 사물들의 병치가 유발하는 효과이다. 민구 시의 독서에 집중하다보면 그 느슨한 듯 아슬아슬한, 하지만 분명하게도 맞닿아 있는, 희미한 의미의 연결선이 매우 흥미롭게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민구 시의 독서의 즐거움은 일차적으로는, 그 어렴풋한 윤곽이 만들어놓는 시적 긴장에서 나오는 것 같다. 사실 이 작품에 묘사된 이미지들은 현실에서 물리적으로는 재현될 수 없는 허상으로서 환영들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망상이나 몽상에 지나지 않는 것, 허깨비의 일종에 불과한 것인가. 아마도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잠정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민구 시의 위상과 의의를 해명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일단 그것은 민구 시가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기표가 정박할 수 있는 의미의 고정점(anchoring point)으로서 확정된 기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논리를 참고하지 않더라도, 일상적 삶의 경험은 어떤 기표도 단일한 하나의 의미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다음으로 특정한 경험의 물리적 불가능성이 현실적 가능성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재성은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는 것으로서 현실성을 구성하는 필수요소이다. 끝으로 시적인 것은 합리적 이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정초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직관에 따라 미학적으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의 심층부로부터 출현하는 헛것들의 형상은 표면적으로 가시화 되지 않은/될 수 없는, 사물들의 무의식이다.7) 시인은 이를 두고 “나무 그늘에도 뼈가 있다”(「오늘은 달이 다 닳고」)며, 진짜 뼈 있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의 표층과 의식의 상부구조를 뚫고 언제든 침투할 수 있는 현재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8) 이상의 맥락에서 이 작품은 언제나 탄생하고 있으며 언제든 무엇으로도 탄생할 수 있는 시의 존재론이라 하겠다. 시인은 사물만이 아니라 유동적 흐름으로서 지나가버리는 것, 미래에서 현재로 오며 과거로 되돌릴 수 없이 향해가는 것, ‘시간’ 역시 언어의 그물로 길어 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아래 시는 아마도, 계절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사물의 언어로 포착한 거의 유일한 한국시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성벽을 뛰어넘어 공주의
복사꽃 치마를 벗긴 전공으로
계곡타임스 1면에 대서특필됐다
도화국 왕은 그녀를 밖으로 내쫓고
문을 내걸었다 지나가던 삼신할미가
밭에 고추를 매달아놓으니
저 복숭아는 그럼 누구의 아이냐?
옥수수들이 수군대는 거였다
어제는 감나무 은행이 털렸다
목격자인 도랑의 증언에 의하면
어제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원래,
기억이란 게 하루 사이에 흘러가기도 하는 거
아니냐며, 조사 나온 잠자리에게 도리어
씩씩대는 거였다
룸살롱의 장미가 봤다고 하고
꼿꼿하게 고개 든 벼를 노려봤다던,
대장간의 도끼가 당장 겨뤄보고 싶다는,
이 사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버스 오기 전에
몽타주를 그려야 하는데
-「가을이라고 하자」 전문
물활적(物活的) 상상력이 비등한 이 시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게 새롭다. 시간성을 포착하려는 어떤 면에서 무망해 보이는 도전 자체가 그렇고, 이를 인간의 시선이 아닌 사물의 언어로 직역하려는 전략과 방법이 또한 그러하다. 물론 이 시의 주인공, “그”는 가을이다. 그리고 “그”는 자명하게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육신을 갖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의 일관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몸을 지니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덧 과일을 익게 하고 곡식을 여물게 한다. 즉 “고추”, “복숭아”, “옥수수”, “감”, “잠자리”, “벼” 등속은 ‘가을’의 현신(現身)인 것이다. 한편으로 “기억”이란,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이란 뚜렷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어서 망각의 늪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정지된 상태로는 붙잡아둘 수 없는 유동적인 것이다. 마지막의 “몽타주를 그”린다는 것은 그 희미한 윤곽만을 포착하고 감지할 수 있을 뿐, 인간적 의식형태와 인지체계로는 접근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환언하여 그것은 비가시적인의 가시성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상투적 리얼리티의 범주를 일거에 초과하는 것이며 따라서, 새로운 리얼리티의 영역을 민구 시가 창안해낸 것과 진배없는 일이다. 시인은 이를 두고 “가을이라고 하자”라고 제안한다. 그것을 무엇이라 확정하여 한낱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겠지만, 눈에 띄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일일이 호명하여 그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은 민구 시가 발견한 득의의 영역이자 고유한 임무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이를 자신이 부름 받은 합당한 소명으로 기꺼이 받아들고자 한다. 민구 시의 다음 행보가 자못 궁금해지는 것은 이상의 감각의 혁신 때문이다.
4. 실재의 리얼리티
이상으로 지난 계절에 출간된 두 권의 시집을 중심으로, 시와 리얼리티의 문제, 시에서의 리얼리티 문제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시대의 시인들이 시적인 것의 현실성을 객관적 표상작용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고 다양하게 확장 · 확대하면서 그 가능성을 실험함으로써, 시의 리얼리티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하며 일궈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2000년대 이후 한국시가 새로이 발견했던 타자의 얼굴을 시적 인식의 대상으로 수용해나가는 과정과도 맞물려 있다. 그것 역시 현실적 존재로서 분명히 있어 왔지만 지금껏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거나 비가시적 잠재태로만 현상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 도래하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가리켜 우리는 실재의 리얼리티라는 잠정적 명명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시의 갱신과 변위 가능성은 낯설고 이질적인 감각의 차원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대변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시와 현실성의 문제를 재구성하려는 여기 시인들의 일관된 태도와 지속적인 실험은 주목해야 마땅한 것이다.
***각주
1) 얄팍한 이기심을 교묘히 위장하는 화자의 속셈과 뻔뻔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흥미로운 이 작품의 전문을 아래 적어두기로 한다. 어린 화자의 위선적 욕망은, “그래도 엄마에겐 제가 또 샘물일 수 있으니까”라는 문장에서 노골화 되고 있는데, 문제는 부모와 시간은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데 있음은 누구나 경험하는 바이다. 이 작품은 사실 소설 속 인물의 독백으로도 처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데, 이는 작가의 탈(초)장르적 지향성이 잘 드러난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친구들한테 얘기했어요./엄마가 위암 절제수술을 하고 나서 날 배신 걸 아셨다고./그대로 출산을 하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유산을 권하는 주변의 말을 뿌리치고 목숨 걸고 낳으셨다고.//친구들이 저한테 불효자라고 욕해요./이번 여행 포기하자는 애도 있었어요./근데 제가 그냥 가자고 우겼어요.//엄마가 좋아하는 선생님들하고 함께하는 그 답사가/엄마 인생에 샘물 같은 거라는 걸 저 잘 알지만요./아버지 사업 잘못 돼 집 잃고, 누나 발령 나서 방 얻어 주시고/한칸 방에 살면서 식구들이 다 모일 때마다 얼마나 마음 쓰리실지 잘 알지만요./그래도 제가 대학 입학한 지 2년 만에 친구들하고 유럽 배낭여행 계획하고/저 정말 밤잠 설치며 마음 설렜거든요. 제가 국가 장학생 돼서 엄마 짐 덜어드린 걸/유세부리는 건 절대 아니고요. 엄마를 답사 보내 드리고 내가 포기하자/이렇게 몇 번 되뇌다가요. 그래도 엄마에겐 제가 또 샘물일 수 있으니까/저도 유럽여행 가서 저를 가득가득 채우고 오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요.//엄마가 저 땜에 목돈 들게 되는 거 이번이 마지막이에요./잃어버린 우리 집 제가 꼭 찾아드릴 건데요./이번 유럽 배낭여행 건/제 욕심만 차린 것 같아 정말 미안해요./마르지 않는 샘물로 엄마를 지켜 드릴게요.”(「샘물」 전문)
2) 이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다음 작품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이 시의 형태는 1연과 3연은 우측으로, 2연은 좌측으로, 그리고 4연은 굵은 글씨체로 가운데, 정렬돼 있음을 밝혀둔다. “사람들 사이에/사이가 있었다 그/사이에 있고 싶었다//앙편에서 돌이 날아왔다//나는 쌱 피했다/뒤축을 자갈밭에 묻고//시궁창에 코를 처박고 ”(「사이 · 2」 전문). 이 시의 중요성은 시집의 해설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박덕규 시작의 원천의 하나로 간주해도 좋을 듯하다. 서문격인 「시인의 말」에 따르면 “첫 시집(1984)을 낼 때 넣지 않았던 한 편을 포함해 내가 소설로 작품 활동을 시작(1994)하기 직전까지 쓴 시들 중에서 십여 편을 되살려 4부에 실었다”고 했으니, 이 작품은 아마도 그의 초기작에 해당할 것이다. 우선 대략 1980~1990년대의 역사적 상황과 결부하여 그 표면적 의미를 짚어보자면, 중립적인 삶의 태도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중간파를 지향하는 화자의 입장은, 어느 한편에서도 용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구절들로 보이는데, 뒤축을 묻고 있으며 코를 처박고 있는 곳이 “자갈밭”과 “시궁창”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것이 암시하며 지시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척박하고 너저분한 ‘현실’이다. 즉 그것의 정체는 변두리의 진흙으로서 ‘누항(陋巷)’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박덕규 시의 사유의 원천의 하나로서, 경험적 현실의 구체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박덕규 시가 내장하는 리얼리티의 일단은, 이처럼 남루한 현실과의 깊은 결속으로부터 생겨난다. 한편 그의 작품들이 포지하는 시적 현실은 그 나머지 일단까지가 설명돼야 온전히 해명될 것이다. 이후의 서술에서 이를 밝히기로 한다.
3) 조리된 만두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눈꽃송이의 개화에 빗대고 있는 이 작품의 비유는, 매우 참신한 것이라 할 만하다. 시의 내부로부터 서서히 번져나는 감각적 환기력을 따라 독자의 상상력은 한층 배가된다. 다음은 전문이다. “함박눈 내리는 날 아이는/한움큼씩 눈을 받아 그릇에 담아 둡니다./눈 담은 그릇들은 올망졸망 이불 속에 잠들고요,/아이는 말똥말똥 윗목을 지키고 있지요.//아이가 굴렁쇠가 되어 들판을 굴러갑니다./도둑들이 쏜 화살들이 비명을 지르며/아이의 꽁무니 뒤를 따라옵니다./아이는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지요.//지나가던 독수리 등 위에 아이가 앉았군요./남쪽으로 여행 가던 수많은 새들이/독수리를 데리고 함께 날아갑니다./하늘 한가운데 은하수가 펼쳐집니다.//아이는 별밭에서 길을 잃었습니다./지친 아이를 보고 뱀이 아가리를 벌렸습니다./그때로군요, 아이의 머리통에서/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는군요.//함박눈 송이마다 꽃이 피었군요./올망졸망 그릇마다 모양도 제각각이군요./뱀 입에도 군침이 돌고/아이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있어요.”(「텐진 만두」 전문)
4) 가령 「속주머니 터지다」 같은 작품의 경우, 현실과 환상을 적절히 교직하는 가운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내면적 파열음과 정화된 시선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즉 “보호색으로 몸을 바꾸고 키를 맞춘 애벌레가/먼지 속의 씨방 하나를 보듬으며/먼 데서 울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다”를 받고 있는, “널브러지고 널브러진 꽃잎들 위로/속에서부터 터진 폭죽이었다”는 전언과 마지막의 “나는 비로소 길 위에 선다”는 시적 출사표가 바로 그것이라 할 것이다.
5) 예를 들어 다음 시는 그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작품의 해석 이전에, 여기에 등장하는 동물과 곤충들은 자연물에 속한다는 것 외에 어떤 내면적 속성도 가시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적어둔다. “뱀은 혀를 깨물었다 해전에서 패한 가오리와 악어는 후궁의 지갑과 가방으로 가공됐다 멀쩡한 이슬을 내온 풍뎅이는 기름 발라 태양국으로 유배됐고 새로운 화포를 고안하지 못한 죄로 무당벌레는 여러 군데 낙인이 찍혔다 노역에 지친 달팽이는 바위를 지고 눈감아준 여치는 두 다리가 꺾였다 주머니고양이는 등에 업은 세자가 울어 정원의 개미를 핥았고 아미산 굴뚝의 잡초를 베던 사마귀는 간통으로 몰려 백 일을 굶긴 배우자와 감금됐다 시를 쓰던 가재는 서가의 모든 종이를 불태우고 바위 아래 매장됐다 거미는 두려웠다 벌써 그에게 빌려온 책이 얼마던가? 그는 죽은 왕에게 하사받은 명주로 책을 감아 문밖에 대기중인 잠자리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왕은 예리하다 거미를 성밖으로 추방시켜 해와 놀아난 달의 가죽을 벗기도록 하고 줄에 매인 잠자리는 천천히 식어갔다 나는 하루종일 불길이 치솟는 성을 바라보았다 새들은 떨어뜨린 문자를 줍느라 대숲을 샅샅이 뒤졌다”(「지붕 위에서」 전문).
6) 가령 「동백」(28~29쪽)의 경우, 제목의 표지를 그나마 유추해볼 수 있는 구절은 “산중턱 어느 곳간에서/발아래 펼쳐둔 장신구”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서 “장신구”는 낙화한 동백 꽃송이의 유비적 상관물이다. 「책」 역시 물리적 실체로서 책은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시 쓴다는 너희 삼촌”이란 구절을 통해, “여긴 위험하니”의 “여기”가 책으로 이루어진 활자들의 추상세계나 공허한 지식체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독서」 또한 의식적 활동으로서 ‘읽기’와는 별반 상관이 없는 가운데, 사물의 기미를 감지하려는 “나의 내부”, “기울고 습한 창고”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7) 민구의 시가 ‘사물들의 무의식’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은, 다음의 매우 인상적인 작품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그것은 사물들의 겉면과 의식의 표층으로는 좀체 떠오르거나 드러나지 않는 것들, “아무리 봐도 모르는/꿈같은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전문을 적어둔다. “숨이 벅차서 급한 대로 비탈에 앉았는데,/아무도 없는 강가에서 이게 웬걸/자갈을 들썩이며 물결들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거대한 전기뱀장어가 자신의 전류에 노출된 채 기다란 자루에서 흘러나온 기름과 햇살을 사방으로 튀기고 있었다/아니면 저 탁한 강을 비출 정도로 선명한 금빛 잉어가 물 위로 솟구친 것일까/눈을 질끈 감아도 철문 밖의 어둠을 단숨에 걸어오는 흰 빛, 내 이마 위에 찍힌 빛의 발자국, 발자국을 덮는 또다른 발자국/오전 내내 떨리는 물결들/그건 다 큰 강이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일/어제 달을 적시지 못한 강물을 시원하게 흘러보내는 강의/꿈같은 일/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던가/길 잃은 새들이 공중으로 팔려가는 걸 지켜봐야 하나, 너는/구름을 풀어서 언제까지 나를 닦으려는 것일까/오전 내내 떨리는 물결들, 난/아무리 봐도 모르는/꿈같은 일”(「꿈같은 일」 전문).
8) 잠재적인 것의 현재적 출현은 따라서, 실재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발적이면서도 불가피한 <실재(the Real)의 방문>이다. 시집을 마지막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아래 작품은, 그러한 ‘불청객’의 돌연한 침입을 형상화한 것이다. “가로등 불빛이/작은방 창으로 들어온다/밥상을 타넘고/안방으로 걸어와서 어머니 가슴에/발을 올려놓는다/괘씸하지만/꽁꽁 언 발을 끄집어낼 수도 없어/그대로 둔다//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도/잠을 깨시는 어머니/늘 걷어차던 이불을 웬일로/한 번 안 차고 주무신다//네가 붙잡았나 싶어서/불빛이 시작한 자리를 가만히/오래오래 본다//저리 보면/달이 뭐 별건가”(「불청객」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