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自然史)의 이념
-박종현의 시 세계
시인이 자연사의 이념에 의존하거나 근접하고 있다는 시적 정황은 먼저, 「치매」 연작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의학적으로 ‘치매’란 정상적인 의식 활동이 정지된 식물성의 상태를 일컫는다. 대표적인 증상의 하나로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세포의 손상과 퇴화, 그리고 이에 따른 망각의 순차적 진행과 점진적 확산이다. 「치매 1」3)에서 “完熟된 망각만/김칫독 가득 삭아가는”, “박제된 메모리만 재생되는” 등의 구절에는 어머니의 병세를 지켜보고 있는 자식의 서러움과 황망한 심사가 배어 있다. 한편으로 이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이중적인데, 기억과 망각의 의미는, 인간적 관점의 의식 차원에서만 유효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다시 말해 “레테강 맑은 물살에 씻긴”이라는 표현은, 의식의 정화(淨化)를 통한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의 궁극적 소멸을 적실히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데아로 향하기 위해서는 망각이라는 레테의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다시금 부활하여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치매 2」에서 “지상으로 내려앉는” 붉은 홍시 역시 마찬가지로, “망각을 견디게 하는” 천상의 과실이다. 하여, 어머니의 기억과 망각은 자연에 의해 치유되고 구원받으며, 따라서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생멸하는 자연사(自然史)의 유장한 흐름 속에 서서히 녹아들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사의 이념은 필시 각별한 시간의식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에 관여하는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인간의 시간의식 외에, 자연의 시간과 속도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각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간이 남겨놓은 주름과 흔적, 자연적 시간의 완만한 속도감을 여실히 포착하고 있는 작품은 단연, 「메주」4)이다. 가령 “짓뭉개진 몸 살갗 터진 세월이 엉겨붙어 푸른곰팡이로 피어나는 날”이 부여하는 선명한 감각표상들은, 날것의 ‘콩’이 ‘메주’로, 다시 ‘된장’으로 형질 전환되는 자연적 시간의 경과와 숙성의 과정을 고스란히 묘사한다. 인간이 만든 음식문화의 하나로서 메주의 숙성과 발효가 자연의 한결같은 섭리에 의존하며 빚지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저 달이 메주 뜬 독 속에서 불러오는 배를 움키며 배시시 웃는 꼴을 또 한 번 봐야 할 텐데”라는 해학적 수사에서 재차 확인된다. 그러한 자연의 깊고 은밀한 속내는, 인위적 제작물이자 문명의 이기(利器)의 하나인, “아직 견문이 좁은”, “밑발 없는 전기 밥솥으로는”, 좀체 알아챌 수 없는 것이다. 「거미줄」, 「절정은 모두 하트 모양이다」, 「탱자나무 울타리」 등에 전경화 되고 있는, 자연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속 깊은 친화력은 이상의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인간사에 대한 불신과 견고한 대타의식에서 형성되고 개진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肉筆로 쓴 원고다”(「거미줄」), “완벽한 하트 모양으로 무르익는 한낮”(「절정은 모두 하트 모양이다」), 그리고 “가시벽도 포근한 둥지가 되는/저, 화엄을 보라”(「탱자나무 울타리」) 등의 진술들은, 이러한 화자의 인식과 태도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자연에 대한 화자의 확고한 믿음과 이에 따른 가없는 경의는, “바람의 警句”, “천국에 이르는 길”(이상 「거미줄」), “진실은 늘 거꾸로 매달려 산다”, “始原의 냄새만 진정한 생명”(이상 「메주」), “아픈 가시도 둥지가 되고/갈기 세운 바람도 노래가 되는”(「탱자나무 울타리」)” 등과 같은 잠언풍의 경구들로 변주되면서 확장 · 심화의 과정을 따르고 있다. 이와 같이 진실이 물구나무서기 하고 있다는 상황 인식, 즉 전도된 세계에 대한 반(反)의식은, “사람들은 왜 그늘 속에서 더 환해지는 걸까”(「그늘의 옆얼굴」)와 같은 역설과 반어의 문장, 그리고 변형된 안티테제들을 생산해낸다. 「그늘의 옆얼굴」5)은 현상과 본질의 이분법 속에 감추어진 존재의 맨얼굴을 재발견하고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로 읽힌다. 나날의 삶과 일상에서 존재(Sein)는 낮게 드리워진 그늘 속으로 깊숙이 은폐되어 있다. 그런 때문에 현상 너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늘 없는 사람들은/양산까지 받쳐들고 그늘의 몸속으로 들어”(「그늘의 옆얼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 마지막 2행의, “야광으로 밝아오는 그늘의 옆얼굴이/환하게 달빛을 갉아먹고 있다”는 결구는, 은폐되었던 존재의 개현(開顯)의 순간을 감각적 이미지로 조명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인의 자선작 7편을 중심으로 박종현의 시 세계에 대한 간략한 소묘를 마쳤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박종현의 시는 인간의 실제나 세속적 인간사보다는 현상 너머의 형이상학적 실체로서 이데아를 뚜렷이 지향한다. 2. 박종현의 시에서 이데아에 근사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자연과 자연사의 이념이다. 3. 박종현의 시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확고한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인간적 시선을 최대한 배제한 채 자연이 내재한 무한한 생명력과 위대한 친화력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4. 이를 한마디로 간추리면, 무연법계(無緣法界)의 대화엄(大華嚴)의 세계이다. 5. 이상의 인식과 관심에 토대한 존재의 개현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존재의 진면목으로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6. 이상의 전체적인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박종현의 시는 동일성과 회감(回感)의 원리에 기반하는 한국시의 서정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제 박종현 시에 내재된 특장으로서, 자연사의 이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지의 문제가 마지막으로 남는다. 이를 위해 약간의 우회로를 경유하기로 한다.
기형도는 1988년 11월의, 「詩作 메모」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6)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자연이 지닌 위의(威儀)와 더불어 숭고(崇高)한 진리환기의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서정적 진실이라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의 내재적 속성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조감된 사물로서의 자연에서 인간적 시선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앞서 “肉筆로 쓴 원고”라는 진술은 거미의 작업에 깃든 자연의 원리를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은 엄연히 시인의 시작(詩作)이라는, 인간적 시선으로부터 유추되고 형상화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잠자리의 교미의 순간을 ‘절정’으로 파악하고 있는 「절정은 모두 하트 모양이다」라는 작품도, 인간의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본능적 차원의 무연(無緣)한 사건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에 특정한 판단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조감된 시선과 의식의 사고 작용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자연 그 자체로서는 어떤 형태의 선도 악도 아니며, 개별적 가치판단의 대상 혹은 영역이 아니다. 결국 그것에 고유한 의미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점이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극진한 외경(畏敬)은 따라서, 하나의 선험적 이데올로기로서 자연사(自然史)의 이념형을 투사한 결과일 수 있다. 덧붙여 한국현대시사에서 서정주가, ‘화사(花蛇)’의 세계로부터 멀찌감치 물러나 현실의 균열과 긴장을 더 이상 시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게 되었을 때, 말년의 양식으로서 획득된 내면의 정관(靜觀)과 정신적 평화주의는 다만 체념과 달관의 포즈로 일관되었을 뿐, 현대시에 기여할 수 있는 어떠한 의미 있는 시도 더 이상 생산해내지 못했다는 문학사적 사실 또한, 엄연히 상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 4)
마르크스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 말미에, “역사는 인간의 진정한 자연사이다(History is the true natural history of man)”라고 적은 바 있다.1) 인간의 역사가 발전과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자연사는 무한한 반복 속에서 반복을 반복할 뿐이다. 그런 뜻에서 위 구절은, ‘진정한 역사는 인간의 자연사이다’라고 바로 고쳐 읽어야 할지 모른다. 한편 인간의 활동에 대립과 통일이 있듯이, 자연의 내부에도 대립과 통일은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일 수 있다. 마르크스의 진의 또한 양자 간의 도식적 이분법을 넘어, 인간의 역사와 자연사의 변증법적 지양과 일여(一如)한 합일을 지향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자선한 시편들에서 시인은 인간사의 실제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거나, 여간 불편하고 거북스럽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박종현 시인의 지향점은 분명 자연사의 ‘이념(Idea)’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를 “진리의 본체”로 언급하고 있는 「치매 1」의 각주2)는, 이러한 시인의 의식지향성과 입장이 비교적 뚜렷이 피력된 것이라 하겠다. 이데아란, 인간이 인식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각주
2) 시인이 단, 각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레테강: 플라톤은 망각(忘却)의 레떼강 너머로 희미하게 어른대는 이데아계(睿智界 idea)가 진리의 본체라 하였다”.
3) 이른 바 ‘치매’ 연작시에는 각기 다른 부제가 달려 있는데, 다음은 그 첫 작품의 전문이다. “더 이상 기억이 살 수 없는/시간도 길도 거기선 살 수 없는,/오직 수숫대 황토벽 너머 完熟된 망각만/김칫독 가득 삭아가는,/내가 나기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지금도/대청마루 모서리 아홉 살 어머니 댕기머리 얼레빗질 하시던/박제된 메모리만 재생되는,/여든 아홉 살 하얀 소녀가/태어나 한번도 건너지 못한 사립문 밖/레테강* 맑은 물살에 씻긴/징검다리가 다소곳 하늘로 닿아있는,/모든 기억들 삭제된 채/댓글만 살고 있는 어머니의/집”(「치매 1-어머니의 집」).
5)
6) 기형도, 「詩作 메모」,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