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房)의 공간 표상과 관계의 동역학

 

 

 

들머리: 사적(史的) 개념, 사적(私的) 공간으로서 ‘방’

 

개념적 정의로서 방(房)이란, 건물의 여러 부속물의 하나이자 벽(壁)이나 창(窓) 따위로 구획된 독립 공간을 일컫는 낱말이다. 인간은 대개 방에서 일을 하거나, 먹고 마시며, 쉬고 잠을 잔다. 한편으로 한국사회의 뚜렷한 문화적 취향을 반영하는 일례로서, PC방 · 노래방 · 찜질방 등속에서의 합성어, ‘-방’은 특정한 사회적 용도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쓰임새에 따른 방의 명명에서 한층 선명해지듯이, 구현된 방의 표현-형식이 아니라 방의 사용사태, 그것에 함축된 내용-형식이 보다 핵심적인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과연 방에서 <무엇을 하는가>라는 물음이 더욱 본질적인 차원에 속한다 하겠다. 미리 말해두어, 물리적 사물이자 인공적 구조물로서 방은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형태의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것은 <질 없는 실재(réalité)>1)이다. 그것에 고유한 숨결을 불어넣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유 · 무형적 활동뿐이다. 따라서 본고의 논의는 인간의 인식대상과 객체로서 방에 대한 단독적, 분절적, 평면적 사유를 전개하기보다는, 방이라는 공간에서 표현되는 사유의 관계방식 또는 방이라는 공간성의 매개를 통해 드러나는 자재한 의식의 활동성, 그리고 그러한 역동적 사건성이 심부에 부여한 입체적인 의미구조 등에 좀 더 집중하기로 하겠다. 이와 관련한 한국시의 구체적 양상을 검토하기 위한 두름길로서 먼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こころ>>(1914)을 실마리 삼아 살펴보기로 한다.

 

K는 곧이어 열었던 장지문을 꼭 닫았습니다. 내 방은 곧 원래의 어둠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조용한 꿈을 꾸기 위해 또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 어젯밤의 일을 생각해보니,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식사 때 K한테 물었습니다. K는 분명히 장지문을 열고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느냐고 하니까, 별다른 뚜렷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맥이 빠질 때쯤 되었을 때, 요즘 깊은 잠이 드느냐고 도리어 그가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2)

 

그 본질적 의미에서 방은, 근대 이후의 개인의 사적 공간이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방은 생활세계의 일부로서 엄연히 존재했으나, 삶의 원리를 스스로 정립해야 하는 실존적 임무가 불가피한 숙명이자 하나의 역사적 과제로 부여되고 인식된 것은 온전히 근대 이후의 개인에게 속하는 일이었으며, 현존재의 물리적 · 심리적 거점으로서 방은 개인의 내밀한 사적 공간이라는 불가침의 지위를 비로소 획득하게 된다. 방은 이제 외부와 절연된 고독한 개인의 절대적 내면성을 상징하며, 생산하는 공간으로 전화(轉化)된다. 세계의 확고한 중심을 점유하는 주체의 사유의 근거지이자 의식의 발화점으로서, 감미로운 실존의 아지트, 광활한 영혼의 베이스캠프가 문득 차려지는 것이다. 앞선 인용은 소설 속 화자 ‘나’와 친구인 ‘K’, 둘 사이의 불안한 긴장감과 심리적 교착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이다. 현재 두 사람은 하숙집 딸을 두고 경쟁관계에 놓여 있으며, 한 사람의 일방적인 고백으로 우정은 일촉즉발의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먼저 둘 사이를 가로질러 있는, “방” 사이의 “장지문”은 물리적 실체일뿐더러 엄연한 심리적 실체이기도 하다. 단절되고 고립된 각자의 방에서 그들은 또, 각자의 동상이몽을 토해낸다. ‘나’의 “원래의 어둠으로 되돌아왔”다는 진술은 따라서, 격절된 내면의 절대성에 대한 실토이다. 둘 간의 관계의 어긋남은, “맥이 빠질 때쯤 되었을 때”라는 표현이 함축한 대화의 지연과 소통의 부재로 보다 명료해진다. 당연히도 ‘나’는 존재의 이물감, 존재의 근원적 이질성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방은, 자아의 고립된 내면과 그 절대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소도구이자 상징적 장치로서 기능한다.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개인의 실존적 고독과 근원적인 존재론적 결핍을 표상하고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인물인 ‘선생님(=나)’이 친구 ‘K’의 죽음을 목도하고, 결국 그 부채감 때문에 자살을 택하는 작품의 결말은 이에 대한 고도의 문학적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운명을 완성하는 행위인 자살은, 실로 근대적 개인에게만 가능한 실존적 결단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라는 내면의 심리적 사실이 외부의 객관적 사실보다 훨씬 중요해진 근대적 개인에 대한 적실하고도 냉정한 비유일 것이다. 이상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방의 표상 작용 및 관계들로 구축되는 시학의 여러 면면들을, 구체적인 몇 개의 작품을 통해 검토하기로 하겠다. 아울러 텍스트 선정의 기준으로서, 논제와의 적합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으나, 여기에는 개인적 취향도 다분히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 또한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현대시의 현장에서, 고립된 자아의 곤혹과 근대적 주체가 처한 난경(難境), 그 처연하고 서늘한 실존의 풍경을 가장 풍부한 밀도와 질감으로 표현한 작가로 우리는 제일 먼저, 이상을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공간 표상: 존재의 묘혈(墓穴)에 걸린 비문(碑文)

 

---어디갔는지모르는안해

 

紙碑一

 

안해는 아침이면 外出한다 그날에 該當한 한 男子를 속이려 가는 것이다 順序야 바뀌어도 하루에한男子以上은 待遇하지않는다고 안해는말한다 오늘이야말로 정말 돌아오지않으려나보다하고 내가 完全히 絶望하고 나면 化粧은있고 人相은없는얼굴로 안해는 形容처럼簡單히 돌아온다 나는 물어보면 안해는 모두率直히 이야기한다 나는 안해의日記에 萬一 안해가나를 속이려들었을 때 함직한速記를 男便된 資格밖에서 敏捷하게 代書한다.

 

紙碑二

 

안해는 정말 鳥類였던가보다 안해가 그렇게 瘦瘠하고 거벼워졌는데도날으지못한 것은 그손까락에 낑기웠던 반지때문이다 午後에는 늘 粉을바를 때 壁한겹걸러서 나는 鳥籠을 느낀다 얼마안가서 없어질때까지 그 파르스레한주둥이로 한번도 쌀알을 쪼으려들지않았다 또 가끔 미닫이를 열고 蒼空을 쳐다보면서도 고운목소리로 지저귀려들지않았다 안해는 날을줄과 죽을줄이나 알았지 地上에 발자국을 남기지않았다 秘密한발을 늘버선신고 남에게 안보이다가 어느날 정말 안해는 없어졌다 그제야 처음房안에 鳥糞내음새가 풍기고 날개퍼덕이던 傷處가 도배위에 은근하다 헤뜨러진 깃부시러기를 쓸어모으면서 나는 世上에도 이상스러운것을얻었다 散彈 아아안해는 鳥類이면서 염체 닫과같은쇠를 삼켰더라그리고 주저앉았더라 散彈은 녹슬었고 솜털내음새도 나고 千斤무게더라 아아

 

紙碑三

 

이房에는 門裨가없다 개는이번에는 저쪽을 向하여짖는다 嘲笑와같이 안해의벗어놓은 버선이 나같은空腹을 표정하면서 곧걸어갈것같다 나는 이房을 첩첩이닫치고 出他한다 그제야 개는 이쪽을 向하여 마지막으로 슬프게 짖는다.

-이상, 「紙 碑」(1936) 전문3)
 

소설 「날개」(1936. 9)의 핵심 모티프를 거의 모두 내장하고 있는 위 시는, 무엇보다 관계의 두절에서 오는 주체의 조난신호로 읽힌다. 그것은 우선 “안해”로 표상된 인물 혹은 타자와 “나” 사이의 깊은 절연성(絶緣性)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房”은 애초에 “안해”와 “나”의 공동의 거주 공간, 공존의 장소였기에, “안해”의 돌발적인 혹은 예상된 외출과 부재는 방의 물리적 현존성을 “나”의 내면으로부터 서서히 지워나가며, “나”가 현실적으로 점유하는 공간으로서의 실제적 의미 또한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안해”의 현존과 부재, 그 부재하는 현존은 “化粧은있고 人相은없는얼굴”처럼 상징적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와 결부되어, “안해”의 부정(不貞)과 기만을 “나”는 당당하게 따져 묻거나 정당하게 비난하지 못하고, “男便된 資格밖에서” 무표정하게 관전할 뿐이다. 이어지는 “안해는 정말 鳥類였던가보다”라는 표현은, “나”와 “안해” 모두 “房”으로 상징되는 지상의 중력으로부터 이탈해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따라서 그들의 “房”은 갇힌 새장, “鳥籠”(혹은 嘲弄)으로 인식되며, 이제 “地上에 발자국을 남기지않”는 무중력 상태의 존재들에게 가능한 것은 날거나 추락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게 된다. 결국 “어느날 정말 안해는 없어”져 버린다. 그제야 “나”는 부재하는 현존의 증거들로서 “鳥糞내음새”나 “깃부시러기” 등등의, 아내의 흔적과 체취들을 때늦게 발견하고 서둘러 확인하는 것이다. 서로의 폐부를 꿰뚫지 못한, 상대방의 과녁에 명중하지 못한 존재의 호소는 오발탄으로 빗겨가거나 “散彈”으로 흩어지며 “주저앉”아 나뒹굴 뿐이다. 여기 주인 없는 “이房”에 마땅한 이정표나 “門裨가” 있을 리 만무하다. 사라진 “안해의벗어놓은 버선이” 실존의 허기를 배가하며, 다만 “나”를 물끄러미 “嘲笑”한다. “안해”의 그림자 속에서 마찬가지로 부재하는 “나”, 또한 “이房”에서 더는 숨 쉴 자리가 없다. 마침내 “나” 역시 “出他”를, 감행한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이자, 기약 없는 존재의 외출로서, 부재하는 공간으로서의 “房”의 의미를 온전히 매듭짓는다. 이곳에서, 종이로 쓰거나 이루어진 “紙碑”라는 허허로운 명명은, 관계의 공백으로 파탄 난 존재의 묘혈(墓穴), “房”에 붙인/ 부친 선연한 비문(碑文)으로서, 은밀하고 서러운 문장(秘文/悲文)이 된다.

 

 

시간-이미지 1: 시간이 교직하는 의식의 점멸(點滅)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힌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힌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글은 다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힌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씿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힌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 마리아 ·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힌 바람벽이 있어」(1941) 전문

 

백석 시의 분석에 앞서, 이 작품과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1948)과의 속 깊은 친화력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사방으로 구획된 공간으로서 방은 벽을 지닌다. 여기 화자가 몸을 붙이고 있는 빈한(貧寒)한 거처에도 “바람벽”이 있다. 비슷한 시기의 “흙으로 바람벽한”(서정주, 「자화상」(1939)) 같은 시구에서 드러나듯이, 선대(先代)의 바람벽이란 그야말로 바람이나 겨우 막을 정도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먼저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서 “힌 바람벽”은 시네마의 스크린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내면의 영사기가 상연(上演)하는 의식의 흐름을 비추는 은막(銀幕)이다. 환언해서 “바람벽”은, 시간을 따라 점멸(點滅)하는 의식의 현상학적 활동 무대가 된다. 여기서 시의 세부적인 언어분석을 논외로 한다면, 이 작품의 의미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간명하게 밝혀진다. 즉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이며 궁핍한 현재의 시간이 부상하는 전반부, 다음으로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중반부, 이어 “글자들”이 새겨지는 후반부로 나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품의 공간적 거점과 시간적 전제가 되고 있는 전반부를 일단 제외한다면, 시의 논리적 중핵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중반부와 후반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이하 중반부를 ‘전자’로, 후반부를 ‘후자’로 칭한다). 이를 다시, 시간의식과 관련한 화자의 의식 지향성에서 살핀다면, 전자는 과거의 시간을 현재 시간으로 재소환하는 ‘다시-당김(retention)’으로, 후자는 미래의 시간을 현재 시간에로 앞서 투사하는 ‘미리-당김(protention)’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물론 전자는, 과거의 경험적 사건이 아니라 화자의 내면이 빚어낸 환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구상력(構想力)의 재료가 되는 것은, 화자가 과거로부터 알고 있는 정보들임이 확실하다. 따라서 이는 본질적으로 과거-시간에 연루돼 있는 것이다. 한편 전자가 일상의 생활과 관련된 의미소들을 함축하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내면적 가치들과 관련된 의미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현실의 불운과 현재의 패배를 견디게 하는 이념적 대상들과 미래의 가치 지향으로 긴밀히 연동되고 있다. 가령 그것들은, “넘치는 사랑과 슬픔”으로 대표되는 시인의 가혹한 운명이나, “굳고 정한 갈매나무”(「南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처럼 순결하고 고귀한 사물들, 그리고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갔던 고금의 거룩한 시인들이다. 따라서 후자에 내포된 핵심의 하나는 분명, 불행한 시인의 숙명과 함께 심장 깊숙이 새겨진 예술가적 자부심, 그 훼손될 수 없는 존엄이다. 그것은 영광의 면류관이 아닐 수 없다. 일방으로 이 작품이 위대한 예술가의 초상이자 시인의 고독한 자화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런 뜻에서이다. 하여, 시인은 지상에 차려진 마지막 방 한 칸에서, 시간이 교직하는 의식의 점멸과 함께 무상한 내부의 부침을 고스란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것은, 속절없는 과거의 잔영(殘影)을 곰곰이 되새김질하거나, 덧없는 현재의 남루(襤褸)를 일일이 탓하는 것보다는, 불현듯 꿈결처럼 도래할 미지의 시간 속으로, 공활한 미래를 향해 한껏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시간-이미지 2: 바닥의 냉기(冷氣)와 두려운 낯설음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1985년 창작) 전문

 

누구나 떠올리는 것처럼, 동요(童謠) 「섬 집 아기」(사실 이 동요는 표면적 선율의 아름다운 서정성과는 달리, 심층적인 비극성을 그 내용으로 함축하고 있다. 분명하게도 이 작품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노동의 핍진성(逼眞性)인 것이다. 또한 아기는 보호자 없는 불안, 즉각적인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의 분위기를, 이 작품은 또렷이 환기시킨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보편적인 유년의 정서를 호출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논리적 중핵이 되고 있는 것은 “엄마”의 부재이다. 빈방에 혼자 남겨진 아이는 무작정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작품의 시안(詩眼)이 되고 있는 것(이 작품의 핵심 정서가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동시에 프로이트의 ‘fort-da’ 실패 놀이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숙제 천천히 하기>이다. 물론 이것은 아이의 입장에서, 명백히 의도된 것이다. 시의 어린 화자는 기다림의 무료함, 남아있는 시간의 무한성 앞에 압도된 나머지 일부러 천천히 숙제를 하는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아이의 입장에서는 기약 없는, <시간과의 싸움>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엄마가 귀가하는 미래의 시간을 ‘미리-당김(protention)’ 속에서 확보해놓으려는 동심(童心)의 시적 주술에 진배없다. 실로 이 작품은, “방”의 공간성보다는 ‘시간’의 문제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되어 있는데, 가령 자연적 시간의 경과를 빗대고 있는 “해는 시든 지 오래”라든지, 텍스트의 바닥으로부터 배어나오는 냉기(冷氣)의 점진적 확산을 적실히 환치하고 있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와 같은 구절들에서 그 참신한 감각적 표현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은 전체 구조의 측면에서도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1연에서의 과거의 서사적 사건(event)을, 2연에서의 현재의 서정적 회감(回感, Erinnerung)으로 처리하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1, 2연에서 화자의 어조는, 이를테면 1인칭 소설에서 경험적 자아와 서술적 자아의 분리처럼 이질적인 것이어서, 뚜렷한 시적 거리를 발생시키며 의미론적 차이를 내재화한다. 한편으로 정신분석의 용례를 따라서 그것은, 아득히 먼 것의 돌연한 현전(現前)으로서, ‘두려운 낯설음(das Unheimliche)’의 비의지적 현현(顯現)이다. 이에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는 정서적 반응은, 회감의 동화작용 속에서 내파(內破)되는 시간, 차오르는 그 시간의 내파(內波)에 따른 효과이다. 그것은 곧, 진정한 시간으로서 <순수 지속 durée pure>4)이다. 김현은 시인의 유작을 일컬어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이라 했거니와, 이 작품의 음울한 목소리의 주인공 또한, 유년의 공간에 갇힌 시간의 문턱과 주름을 매만지며 넘나들고 있다.

 

 

관계의 동역학: 존재와 사건

 

비가 그친 후 어느날 ---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直線으로 혹은

對角線으로 맞닥드리는 것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逆流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

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느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있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자루의 부채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말락 나의 視野에서

멀어져가는 것―――

하나의 가냘픈 物體에 도저히 固定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思想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김수영,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1954) 전문

 

 

김수영 시의 주조적 정서의 하나인 ‘설움’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이 시의 제목은, ‘설움이 익어가는 방안’이 아니라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으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글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했던 것처럼, ‘방’의 실체는 개별적 단독성으로 인식되는 존재자가 아니라, 관계들의 집합적 배치를 통해 그 역학적 구도 속에서 발생하며 파악되는 존재론적 사태의 일부이다. 그런 뜻에서 위 제명은, 김수영 역시 방의 텅 빈 공간성보다는 그 여백의 존재성,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의식의 활동성과 감정의 양태들, 그리고 무엇보다 “익어”간다는 말에서 분명히 감지되는 시간성 등에 더욱 주목했다는 간접적인 증거로 삼을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단적인 진술로서,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느냐”는 탄식과 새삼스런 발견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존재는 시간의 지평 속에서만 포착될 수 있다는 단호한 진술로 간주해야 마땅해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오고가는 것이 直線으로 혹은/ 對角線으로 맞닥드리는 것같은 속”이란, 시간의 순차적 흐름 또는 시간의 교차와 역행을 상징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설움은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워서, 지우고 감추고만 싶은 부정적 감정이다. 그리고 감정의 표백(漂白)과 더불어 그 잔흔(殘痕)까지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서는, 특정한 감정에 붙들려 있는 리비도 고착상태를 풀어놓는 의식의 개방 행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도 “설움을 逆流하는” 것만을 애써 추구하려는, 화자의 집착이나 감정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은 필시 실패하게 마련인 것이다. 즉 우리들 인간의 의지와는 달리, 여일(如一)하게도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화자는 다시 한 번 필사의 노력으로, 설움으로 마비된 “시간과 함께” 사물을 “비스듬히 내려다보”기로 한다. 그러나 설움의 정동(情動)은 여전해서, 화자의 시선은 한곳으로 “도저히 固定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최후의 단 하나의 방법은 이것뿐이다. 완만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설움이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것>. 설움이 제풀에 물러나는 것은 물론, 그 연후다. 마침내 설움으로 미만한 방과 시간 속으로, 스스로를 전면적으로 개방하여 내맡기는 실존적 결단이 요청되는 것이다. 뒷부분의 “고요한 思想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라는 구절은 바로, 존재의 역동적 사태들에 순순히 자신을 열어놓는 현존재의 능동적 힘과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이는 감정의 인위적 조작과 부정이 아니라, 그것의 적극적 수용이자 초연한 긍정이다. 물론 이후의 사태들의 전개에 대해서 주체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지만, 화자는 마지막 연의 진술들에서, 감정의 인위적 조작과 의식적 부정이 지닌 위험성과 함께, 그러한 시도가 부질없으며 명백히 무망(無望)한 일임을 재차 깨닫는다. 이 작품에 드러난 생멸하는 감정의 무상성(無常性), 존재의 무한한 역동성이 충실히 지시하고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인연(因緣)이란 내부의 원인인 인(因)과 외부적 조건인 연(緣)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사태, 존재의 어떤 관계적 사건들이다(군말로서, 이 시에서 인(因)에 해당하는 것은 설움이라는 감정이며, 연(緣)에 해당하는 것은 방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곳을 채우고 있는 시간일 것이다). 하여, 삼간(三間: 人間 · 時間 · 空間)이란 다시금 현존재를 구성하는 불변의 상수(常數)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끝으로 우리가 확인하며 발견하게 되는 것은, 존재의 완강한 거멀못으로 수립되는, 비참하고 영광된, 관계의 동역학이라 할 것이다.

 
1)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최화 역, 아카넷, 2001, 124쪽. 방의 공간 표상과 관련하여 우리는 물론, 바슐라르의 일련의 현상학적 작업들을 참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공간의 시학>>(1957) 같은 저작들은 그 세부목차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방’보다는 ‘집’의 다양한 표상 작용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어서, 이 자리에서 함께 거론하기에는 그다지 적절치 않다. 더군다나 그가 주목하고 있는 ‘집’이란 유럽의 전통적 가옥양식에 주로 기반한 것이어서, 그 논리적 정합성을 차치하고서라도 한국시의 구체상을 살피는 데 곧바로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2)
나쓰메 소세키, <<마음>>, 박유하 역, 웅진출판, 1995, 281쪽.

3)
<<중앙>>, 1936. 1.; 이상은 1935년 9월 15일, <<조선중앙일보>>에 동명의 작품을 먼저 발표했던 바가 있다. 여기 함께 적어두기로 한다.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작아서다리는짧고바른다리가아프니내바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夫婦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無事한世上이病院이고꼭治療를기다리는無病이끝끝내있다”(이상, 「紙 碑」(1935) 전문).

4)‘구별되지 않는 indistincte 다수성’, ‘질적인 다수성’이라 명명할 수 있을 <순수 지속>의 개념을,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간단히 말해 순수한 지속은 분명, 명확한 윤곽도 없고, 서로의 밖에 있으려는 어떠한 경향도 없으며, 수(數)와는 어떠한 유사성도 없이 서로에 녹아들고 서로 침투하는 질적 변화의 연속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순수한 이질성일 것이다”(앙리 베르그송, 같은 책, 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