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정치학의 문제- ‘변방의 아이들’을 위하여: 구병모, 「고의는 아니지만」(<<작가세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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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는 계급투쟁이 삶의 일부로서 일상화되어 있는 공간이다. ‘고의는 아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적대 관계는 어떤 계기를 통해 ‘우발적으로’ 폭로되기도 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무상 급식 문제는 이러한 계급적 적대 관계를 완화시키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저소득층에게만 무상 급식을 제공할 경우 아이들의 점심시간은, 돈을 내고 밥을 먹는 아이들과 거지처럼 공짜로 밥을 먹는 아이들로 나뉘어 계급투쟁의 살벌한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밥 먹을 때만이라도 공평하게 인간적 존엄을 느끼게 하자는 것이 무상 급식의 본뜻일 것이다. 구병모는 과거 「학문의 힘」에서도 그러했지만 「고의는 아니지만」에서도 미시정치학의 문제 혹은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예민한 후각을 보여준다. 가장 순수해야 할 동심의 세계인 유치원이라는 공간에서조차 미시정치학은 여지없이 작동된다. 먼저, 아이들은 그들의 개성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준비물의 유무에 따라 식별된다.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아이들의 부모들은 대개, “학습지 교사, 환경미화원, 배관공, 택배 기사, 덕트(통풍구) 관리 보수자”(201쪽) 등의 직업을 갖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노동시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편부모 가정의 가장들이다. 이들 가정의 아이들은 각자의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A · B · C · D ·E”의 기호로 불린다. 이는 그들이 개성을 상실하고 사물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미술 시간에 아이들은 준비물에 따라 원탁과 네모 탁자에 따로 배정된다. 원탁의 아이들은 은연중에 “그들과 자신들 사이에 놓인 강의 폭과 깊이를 깨닫는”(203쪽)다. 네모 탁자에 앉은 아이들 부모들의 공통점은, “부모가 모두 있고 그 부모 중 한 사람-주로 아빠가 일을 하며 그들은 대개 전문직이다. 엄마는 로코코풍 양식이 돋보이는 아치형 대문 앞에서 일과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를 기다렸다가 아이가 나오면 차 문을 열어주고 타라는 턱짓”(203쪽)을 한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원탁의 멤버들처럼 유치원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그네를 타다 어슬렁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203쪽). 그들의 일과는 학원으로 이동할 시간만으로도 늘 촉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우연적 사태이고 따라서 아이들이 부모의 직업에 따라 차별을 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모든 언어는 ‘명령어’로서의 속성을 지닌다. 특히 계급적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 화자의 언어는 청자에게 직접적인 행동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준비물을 줄곧 챙기지 못하는 원탁 멤버들은 네모 탁자의 아이들로부터 “별 거지 같은 게, 주는 대로 처입을 것이지 꼴에 존심 세우고 지랄”(206쪽)이라든가 “너, 나가 죽어”(207쪽), “그 걸레짝 집어다 버려 빨리 찌고 끝내 왜 버티고 서서 우리를 기다리게 해 더워 죽겠는데!”(209쪽) 등의 폭력적 언어를 무언의 소리로 듣는다. 재롱잔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다시 네덜란드 민속춤 팀과 아프리카 원주민 춤 팀으로 나뉜다. 원주민 팀 아이들은 항의한다. “하지만 불공평하잖아요. 쟤들은 예쁜 거 하는데 왜 우리만”(213쪽). 아이들이 계속 저항하자 유치원 교사 F는 ‘고의는 아니지만’, “그렇게 말 안 듣는 사람들 나중에 뭐가 되는지 알아? 너희도 커서 너희들 엄마 아빠처럼 저런 일 하면서 살고 싶어!”(214쪽)라며 아이들의 예민한 감성을 건드리고 만다. 아이들의 눈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점화되어 있었는데 이 불꽃은 그동안 간간이 겪어 온 사소한 불편과 불쾌, 그에 따른 불만의 표정과는 비할 바 없는 크기로 타오르기 시작”(214~215쪽)한다. 그리고 이 말은 유치원 철조망 너머에서 일하던 인부들의 귓전을 울린다. 그들의 가장 민감한 정치적 성감대를 자극한 것이다. 세계는 무수한 인정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은 때로는 사소한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걸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인부 가운데 한두 사람이 내장으로부터 길어 올린 듯 큰 소리로 침을 뱉”(214쪽)는다. 그날 밤 당직 교사였던 F는 퇴근길 주택가에서 살해당한다.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떤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란 흠결 없는 순백의 공간으로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어야 했다. 순수의 대유법인 어린이들의 신체와 영혼을 돌보는 유치원 교사가 성실한 하루 근무를 마친 뒤 귀가하는 길에 폐허가 아닌 사람 사는 곳에서 액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은 신전 훼손이자 동심에 대한 도전”(217~218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라는 미명 아래 인간 행위의 비정치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언어는, 우리가 몇 해 전 촛불시위에서도 경험하였듯이, 누구보다도 정치적이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비정치적 순수성을 고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몽상에 불과하며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라는 존재 구속성을 갖는다. 결말부에서 “아이들 입장에서는 화장실도 안 가는 줄 알았던 선생님을, 단백질과 칼슘 및 질소를 비롯한 몇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유기체”(218쪽)의 물질성으로 목도했다는 진술은 기호의 폭력이자 유물론과의 우발적 마주침을 암시한다. A · B · C · D · E를 비롯한 ‘변방의 아이들’은 사태를 직감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농지 같은 미소를 짓는다”(219쪽).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잘,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를 구별해낼 줄 안다. 동심(童心)이 뱀의 교활함을 닮아간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지만 양의 순결함만으로 어른들의 세계에 진입할 수는 없다. 정작 어려운 것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면서도 자신의 순결성을 보존하는 일이다. 이 작품이 계급적 적대 관계를 다소 도식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점이지만, 서술자는 계급투쟁의 문제를 비교적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처리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계급적 적대 관계를 은폐하기보다는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보다 공정한 사회를 위한 발걸음이 될 수 있다. 미시정치학의 문제가 그의 소설에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