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당위 사이에서- 문학의 정치적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가

: <<문학, 무엇을 할 것인가>>(동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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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물음은 당위론적 명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명제로서 수행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론의 실천 영역이 아니라 존재의 기투(企投)를 통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능동적 역능(力能)의 실현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의 정치적 실천의 문제는 과거 한국문학의 화려했던 시절을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방식, 예를 들어 1980년대를 ‘아! 옛날이여’ 식으로 호명하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지금-여기의 시대정신으로서 가장 절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포착하고, 이에 대한 실존적 응답의 목소리로 주체의 내부에서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는 울음의 형식이어야 한다. 요즈음 대학생들이 예전에 비해 정치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불만이 종종 제기된다. 대학이 직업양성소로 변질된 지는 이미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고, 이른 바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대학생들은 학점의 노예로 길들여지고 있다. 그들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취업 문제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학점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것은 경제논리에 기초한 사회 전 부문에서의 실용주의의 득세에 기인한다. 2010년대 한국사회는 실용주의라는 단일한 가치에 붙들려 있다. 따라서 작금의 정치적 실천이나 문학의 사회적 기능의 회복의 문제는 이러한 실용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

㰡”문학, 무엇을 할 것인가㰡•(이하 㰡”문학㰡•으로 약칭)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유구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변모한 동시대의 환경 속에서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정치적 실천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사색의 결과를 담은 열 명의 강연록을 한자리에 갈무리한 것이다. 그러한 저간의 사정과 포럼을 주도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기본적인 입장은 책의 머리말에 간명하고도 분명하게 피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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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의 전통 중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세계에 대한 구체적 발언과 실천일 것이다······역설적으로 직접적인 실천 행위를 버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문학적 감성과 지성에 그것을 되비췄던 유구한 전통이 작가회의의 생명력은 아니었을까······문학계 내부의 일각은 빠르게 상품 사회로 편입되어 가고 있고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점점 소실되어서 급기야 어떤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위기의식이 ‘통찰과 연대’라는 포럼을 시작하게 했다······포럼 및 발간사업의 가장 큰 줄거리는, 문학은 문학 자체로 성립한다는 우리에게 내면화된 신화를 해체하는 일이었다. 우리 문학사의 전통 중 하나가 바로 문학을 가운데 둔 일종의 영역 분쟁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일까······어쨌든 우리는 문학이 문학 자체로 성립된다거나 문학도 시장에서 독자들에게 선택되어야 가치가 있는 거라는 입장과 거리를 두고 있다(이상, 「머리말-새로운 문학의 실천을 모색하다」, 㰡”문학㰡•,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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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시각을 공유하고 있는 책의 세목들은 「대지로 회귀하는 문학」(김종철), 「고향을 돌아보라, 천사여!」(도정일), 「저강도 파시즘」(현기영), 「분단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한 과거사 더듬기」(염무웅), 「광주항쟁 이후, 새로운 주체의 탄생」(조정환), 「분열, 상실, 자아」(김상봉), 「한 여성노동자의 삶」(김진숙), 「악마의 맷돌 아래에서-우리 문학의 미래」(김형수), 「쓰고 싶은 글, 써야만 하는 글」(김해자), 「소수자되기」(윤수종)로 이루어져 있다. 각 필자들의 진정성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1970~1980년대에 대한 낭만적 회고의 시선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문학의 화려했던 과거를 탈역사화하고 추상적으로 이상화하는 것은 정치적 나르시시즘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문제의 해결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문학은 ‘쓸모없는’ 것이다. 문학이 구체적 현실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문학의 정치적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문학이 지닌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없음의 쓸모’를 철저히 자각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다른 미래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문학은 현실을 모방하지 않음으로써만 현실을 모방할 수 있다. 대신 문학은 자동화되고 관습화된 우리의 일상과 의식에 균열을 내고 지각의 쇄신에 기여할 수 있다.

문학은 언제나 주체화의 과정을 동반한다. 정치 문제에 대한 문학적 발언이 자신의 실존과 결부된 절박한 문제로 파악되지 않을 때, 그것은 무병신음(無病呻吟)하는 과장된 몸짓으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과거 김남천이 ‘일신상(一身上)의 진리’라는 개념을 통해, 창작과정에 있어 주체화의 문제에 대해 고심을 거듭하였으며 끊임없는 자기갱신의 길로 나아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김해자의 「쓰고 싶은 글, 써야만 하는 글」의 문장들은 주목에 값한다. 그는 쓰고 싶은 글을 ‘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글’이라 칭하고, 이러한 “내면의 소리가 세상의 신음과 일치할 때, 밀실의 심장이 거대한 광장의 울음소리와 만날 때, 우리는 더 자유롭게”(259쪽)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시대의 불행은 여전히 ‘쓰고 싶은 글’과 ‘써야만 하는 글’이 불일치하거나 ‘살아야만 하는 삶’과 ‘살아지는 삶’이 분리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것은 시인에게 자유와 책임감 사이의 분열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끝내 김해자는 ‘미안함이 나와 세계를 구원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투표라는 정치행위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전면적 후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몸소 경험한 바 있다. 써야만 하는 글을 애써 외면하거나 살아야만 하는 삶에 충실하지 못할 때, 우리는 정작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게 되거나 살아지는 삶마저 상실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여기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조정환의 「광주항쟁 이후,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윤수종의 「소수자되기」는 그 구체적 실천의 지침과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조정환은 네그리의 ‘다중(multitude)’ 개념에 착안하여 광주항쟁 이후 2008년 촛불집회에 이르는, 매체 환경의 변화에 기반한 새로운 운동의 형태와 대중의 결합방식에 주목한다. 윤수종은 들뢰즈 · 가따리의 소수자 개념에 천착하여 진리의 담지자로서 노동자 계급의 위상과 그간의 노동운동의 공과를 점검한다. 그에 따르면 소수자는 ‘표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정의되며, 여기에는 게이, 레즈비언, 흑인, 장애인, 노숙자, 넝마주이 등 이질적 성격을 지니는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이 포함된다. 그는 소수자라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보편적 개별자로서 개인에 내재하는 소수성(minority)에 초점을 맞출 것을 강조하면서, 소수자운동은 실제적인 삶의 상호작용 속에서 신체화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생체 정치적 투쟁으로까지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학의 윤리학은 타인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최근 발생한 고려대 의대 성폭력 사건은 해당 가해자 학생들의 출교처분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피해 여학생의 고통과 상처는 쉽게 씻기지 않을 것이다. 가해 학생들에 대한 출교 결정 이후, 이 대학에서는 인터넷 싸이트(cheerup201109.blogspot.com)를 통해 피해 여학생에게 전할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모으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는 직접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의 메시지도 있지만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편지글 형식이지만 이러한 형태의 문자행위도 문학적 실천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요즈음 대학가 주변에서는 노숙자들이 재활을 위해 손수 제작한 㰡”BIG ISSUE㰡•라는 잡지가 팔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잡지 한 부 사는 일은 보잘것없는 일이겠지만, 그들의 노동의 결과물을 직접 사서 읽는 것도 독서라는 문학적 실천 행위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정치적 실천은 뜻밖에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실현될 수 있다.